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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눈치싸움

서필 목원대 교수·테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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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3.03.21 14:11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서필 목원대 교수·테너
르누아르의 명화 중에 특별관람석이라는 작품이 있다.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남녀 커플을 그린 그림이다. 귀부인은 상당히 멋들어진 헤어스타일과 장식, 그리고 고급 드레스를 입고 있고, 뒤편의 일행 남자는 이브닝 코트 차림에 오페라 글래스로 무대가 아닌 위쪽의 다른 객석을 훔쳐본다. 다른 여자를 보고 있는 게 분명하다. 확실한 건, 남녀 모두 공연 관람만큼이나 중요한 다른 목적이 있어 보인다.

예전부터 오페라 하우스는 지위와 재력을 과시하는 자리였다. 유명 작곡가의 오페라 초연엔 국왕이나 교황, 그리고 각계각층의 지도층 인사와 귀족들이 모였다. 오늘날 각종 영화제의 시상식 레드카펫에서 배우들의 화려한 의상은 여기서 비롯됐다. 최신유행과 정·재계의 이슈를 가지고 모인 사람들에게 오페라 하우스는 그에 걸맞은 무대를 제공했다. 연주자는 물론 공연을 보러온 관객들에게도 말이다.

유럽에선 가발이 부의 척도였다. 탈모는 늘 골칫거리였으니까. 그러나 중세교회에서만큼은 사정이 달랐다. 모자나 가발을 쓰고 교회에 들어가는 행위는 하늘에 있는 신과 땅의 인간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사탄의 행위로 간주했다. 그래서 밖에서 모자를 쓰고 있다가도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자를 벗고, 가발 착용도 엄격히 금했다. 오늘날 서양에서 실내에선 모자를 벗는 것이 예의가 된 것은 이 전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신 중심의 사회를 벗어난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면, 실내외에서 착용 가능한 가발을 선호했는데, 이 가발의 크기와 화려함이 곧 지위를 뜻했다. 작곡가 헨델이나 바흐의 초상화를 보면 여자같은 치렁치렁한 긴 가발을 쓰고 있다. (헨델이 음악의 어머니라서가 아니다!) Powdered Wig이라고 불리는 이 가발은 흰색인데 문자 그대로 밀가루 파우더를 발라서 색깔을 냈다. 흰색이 권위와 지성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사족이지만 보온보습이 잘되고 밀가루까지 발라져 있어서 벌레와 쥐들이 무척이나 좋아했다.

귀족들과 왕족들의 가발은 엄청난 사치품이어서 베르사유 궁전에선 가발 관리사만 수십 명이었다고 전해진다. 왕정복고 시대의 이 가발은 현재 영국 법정에서도 쓰이는데 법조인과 일반인이 구별되지 않는 익명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상은 몇백만원을 호가하는 고급 말총 가발이었다. 익명성과 더불어 권위주의의 상징으로 영국 법정에선 지금도 착용한다. 고액연봉의 판사들이야 마련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겠지만, 일부 법정 변호사들은 중고 가발을 서로 거래했다는 문헌 기록이 남아있는 걸 보면, 딱 요즘의 중고차 시세였던 것 같다.

절대왕정의 시기엔 가발의 크기와 높이가 계급과 재력의 척도였다. 최대한 겹겹이 쌓고 컬을 넣어 부풀렸지만 가발모 자체의 장력으론 어림도 없게 되자, 나중에는 1m 가까운 철심까지 넣었다. 바벨탑처럼 욕망의 높이를 쌓아가던 가발 높이가 더해지다 보니, 나중엔 쓰고 벗는 것도 만만찮은 시간과 힘이 들게 되어, 귀부인들은 큰 행사가 있는 전날엔 가발을 쓴 채로 고정하고 아예 앉아서 잠을 잤다고 한다. 오페라 무대에선 가발의 크기로 여자 주역인 프리마돈나들의 신경전이 펼쳐졌고, 사교계에선 귀부인들끼리 총성 없는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제아무리 귀족들이라도 눈치를 봐야 할 때가 있었는데, 바로 왕과 왕비 앞에서였다. 왕족보다 화려하고 높은 가발을 착용하는 건 곧 왕권에 대한 도전이었기에, 귀족들의 가발 높이는 왕족보다는 낮게, 그러나 다른 귀족들보단 높아야 했다. 눈치껏 높이 경쟁을 했고, 위로는 승산이 없던 남자 귀족들은 반대로 아래로 뻗는 수염을 경쟁적으로 기르기 시작했다.

3월 개학과 더불어 각급 학교에서 학부모 총회를 한다. 이때 학부모들이 어느 정도 꾸미는지가 경쟁이 되어서 이른바 학총룩(학부모 총회 룩)이라는 단어가 생겼다. 너무 꾸미고 가면 과하고, 그렇다고 적당히 걸치고 가기엔 아이 기가 죽을 것 같고, 그래서 눈치껏 호화스러움을 잘 맞추는 것이 관건이고, 이 기간 명품 일일 대여 서비스도 호황이란다. 그렇게 전국의 3월은 아이들의 학용품과 더불어 학부모까지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것이 넘쳐나는 달이 되었다.

이웃 나라 일본은 4월 개학 때쯤 초등학생 가방으로 계층 간 갈등을 겪는다. 란도셀이라는 커다란 가죽가방인데 최하 30만 원부터 180만 원까지의 비싼 가격 때문에 매년 홍역을 치른다. 가방의 본래 기능성과는 별개로 란도셀이 가지는 가치가 명품처럼 소비되는 것이 큰 문제로 불거진 것이다. 우리도 특정 브랜드의 학생 패딩이나 고가 유모차가 문제가 되었듯, 란도셀이 일본 사회의 계층을 나타내는 일종의 마커로 기능하다 보니 일부 명품 브랜드의 경우에는 학부모들이 백화점 오픈런도 불사한다고 한다.

모든 것이 눈치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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