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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나무

정관영 공학박사·우석대학교 건축인테리어디자인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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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3.03.26 14:44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정관영 공학박사‧우석대학교 건축인테리어디자인학과 객원교수
마을 어귀를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것은 소박하게 다가오는 느티나무다. 언제나 사시사철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산소호흡을 하는 모든 생명의 모태는 나무이다. 나무는 곤충을 낳고, 새를 품으며 사람을 맞는다. 그러나 군림하지 않고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놓음으로써 다른 생명이 숨 쉴 수 있도록 해 준다. 나무는 나무를 갉아 먹는 작은 애벌레나, 열매를 주워 먹는 다람쥐나, 밑동을 베는 벌목꾼을 가리지 않고 제가 지닌 것을 기꺼이 내어준다.

사람보다 먼저 생겨나 수많은 세월을 살아온 나무의 그 무한한 힘은 어디서 생기는 걸까. 그 모진 삶을 나무는 대체 어떻게 견뎌 왔을까. 어떻게 같은 자리에서 흐트러짐 없는 자태로 삶을 꼿꼿이 지켜낼 수 있었을까.

나무가 자라는 환경은 저마다 다르다. 그런데도 나무들이 올곧게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각자 다른 나름의 생존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위 환경을 파악한 후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탁월한 적응력으로 찾아내는 담쟁이처럼, 먼저 꽃피울 가지를 만든 다음에 체력 보충을 통해 백일 동안 차례차례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 마디를 만들 때마다 속을 비워 자신의 삶을 곧게 유지하는 대나무, 열매와 꽃을 동시에 피워 앞으로의 후손을 판단하는 차나무 등 우리는 나무를 통해 또 다른 깨달음을 얻는다.

그뿐만 아니다. 나무는 다른 존재와 협력하며 살아간다. 충분히 독립 수로 살아갈 능력이 있으면서도 다른 나무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울타리로서의 삶을 사는 쥐똥나무, 정겹게 서로를 다독이며 마주 나는 자귀나무 등 서로 상생하며 위기를 극복하는 나무들의 삶은 경이롭기만 하다.

나무는 또 우리에게 자기 몸을 내어주며 집을 짓게 하고, 가구나 도구 등을 만들게 한다. 나무는 부드러운 질감과 촉감으로 쇠나 시멘트와는 달리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준다.

목재 표면에는 쉽게 먼지가 쌓이지 않는다. 진드기, 곰팡이 같은 것도 기생하기가 쉽지 않다. 그 나름 싱그러운 냄새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맑고 편하게 해 준다. 그런 나무에 대한 고마움이 자연스럽게 글과 그림으로 이어지고 쌓여서 우리네 정신문화의 한 축을 이루어 오기도 했다.

건축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조형과 쓰임이라는 실용의 측면 이전에 그 물성에도 남다른 관심이 있다. 거기엔 나무가 자연스럽게 전해주는 삶의 온기와 긍정의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사람은 평생 55㎥ 정도의 나무를 사용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약 500그루의 나무가 필요하다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사용하는 일회용 기저귀부터 죽어 관에 들어가 묻힐 때까지 평생 나무에 의존하고 사는 게 우리의 인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무를 심기보다 자르는 데 더 익숙하다.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이 매끈히 잘려 나가고 난 후 나무는 최후에 그루터기가 된다. 안쓰럽게도 살아온 세월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키 낮은 흔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그늘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마운 것은 그 그루터기에 앉아 긴 한숨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비워 두었던 별채의 사랑방에 온기가 돈다. 나무의 잔영이자 살붙이인 장작이 타닥 탁탁 타오르고 있다. 살아생전의 마지막 열정이 아궁이에서 불꽃을 피워내고 있다. 몸의 마지막 조각마저 아낌없이 불태우는 희생이라니.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 고난을 견디어 냄으로써 생명은 일단 진화한다. 핍박을 통해 모든 것을 포용하는 관대가 생기고, 궁핍과 형벌로 자유와 고귀함을 얻을 수 있다.”라는 성경 말씀이 생각난다.

어려울 때일수록 근본을 붙들어야 한다. 바람에 흔들릴 때 더욱 단단하게 흙을 부여잡는 뿌리처럼 살아야 한다. 바람이 불 때 집을 짓는 새들처럼 살아야 한다. 위기일수록 근본을 살펴야 한다.

오랜 고목이 베어진 자리, 그 그루터기가 말없이 앉아 있다. 그 언저리에는 푸른 식물이 덩굴을 뻗어 또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고목이 내어준 빈틈에는 버섯이 보금자리를 틀고 있다. 내 아픔이 저렇게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만 있다면.

그렇다. 제 몸을 아낌없이 내어 준 나무는 이제 그렇게 낮은 그루터기로 남아 매일같이 새 꿈을 꾸고 있다.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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