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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詩 하나 가슴에 품고 사는 삶으로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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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3.06.06 13:58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앞집에 사시는 할머니가 늦은 저녁 시간 초인종을 눌렀다. 무슨 일인가 나가봤더니 냉면 그릇보다 조금 큰 그릇에 청매실을 한가득 담아 들고 서 계셨다. 아들이 어느 지방에 일하러 갔다가 오는 길에 사 왔다며 나눠 주신다. 넙죽 받아들고 보니 고마워서라도 차 한 잔을 대접해야 할 듯했다. 잠깐 들어오시라고 소매를 잡아끌었다. 할머니는 못 이기는 척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셨다.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할머니가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놓으셨다. 철자법을 무시한 채 연필로 꾹꾹 눌러 쓴 초등생 필체, 당신께서 지난 며칠 동안 시를 썼는데 한 번 봐 달라는 것이었다. 아들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지만 직장 생활과 잦은 출장으로 늘 바빠 보일 틈이 없었다며 내게로 가지고 오셨단다. 마침 청매실도 나눠 줄 겸 겸사겸사 당신의 시를 보여주고 싶었노라고 할머니는 속내를 드러내셨다.

시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읽고 있으니 진심이 느껴졌다. 아들이 출근하고 난 텅 빈 집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느낀 감정을 시로 표현한 내용이었다. 연필로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한 고심의 흔적이 고스란히 종이 위에 남아있었다. ‘참 좋은데요.’ 하는 나의 한마디에 할머니는 초등학생이 상장이라도 받은 듯 얼굴에 미소가 번져 났다. 집에 써 놓은 시가 몇 편 더 있다며 할머니는 또 다음을 기약하고 댁으로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작년까지만 해도 집 안에서 하는 일 없이 TV만 보고 사셨다고 했다. ‘앉았다 누웠다’를 반복하며 출근한 아들의 퇴근을 기다리는 일이 전부였다며 무료했던 당신의 과거를 털어놓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TV에서 문해교실 노인들의 한글 공부 이야기를 본 뒤로 끄적끄적 글쓰기가 시작되었단다. 하루에 한 줄 쓸 때도 있고 어느 날엔 새벽에 일어나 단숨에 써 내려가는 날도 있다며 하루가 전에 없이 지루하지 않고 즐거워졌다고 할 때 나는 속으로 할머니의 새로운 세상에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나는 요즘 퇴근 후 다시 출근하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우리 지역에서 개최하는 올해로 4회를 맞이한 전국 시 낭송 대회가 보름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한창 일하고 있는 직장이고, 퇴근 후 저녁이고 수시로 걸려오는 문의 전화로 바쁘다. 어김없이 저녁이면 퇴근과 함께 노트북 앞에 앉아 참가신청서를 접수한다. 신청자의 신상을 기록하고 시 원문과 낭송 파일을 대조하며 정상적으로 접수되었다는 답장도 잊지 않는다. 바쁜 날들이지만 그로 인해 얻는 기쁨도 만만치 않기에 지치지 않는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주옥같은 좋은 시들을 많이 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이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시가 많이 있었던가. 어쩜 그리도 시어(詩語) 한 글자 한 글자가 마음을 파고드는지…. 추억이 내 안에서 피가 되고, 시선과 몸짓이 되고, 나 자신과 구별되지 않을 만큼 이름 없는 것이 되어야, 그때에야 비로소 아주 가끔 시 첫 행의 첫 단어가 그 가운데서 떠오를 수 있다고 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한마디가 이해되는 순간이다.

어떤 시가 되었든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사는 삶을 추천한다. 시 한 편이 그 사람 생에 한 자락을 건드려 마중물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날이 그날 같은 긴 긴 날이 어느 순간 앞집 할머니의 일상처럼 짧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아무리 바쁘고 지친 날에도 좋은 시 한 편 읽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고단함은 사라지고 삶의 생기로 자리 잡을지도 모른다. 살아오며 부딪혔던 크고 작은 날들의 위로가 되고, 앞으로 나아갈 삶에 보이지 않는 버팀목이 되는, 오랜 친구 같은 좋은 시 한 편 가슴에 하나쯤 품고 사는 저마다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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