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울 학(學)’자는 상형자다. 모양을 본떠 만든 글자. 찬찬히 글자를 뜯어보면 아이(子)가 책상(?) 앞에 앉아 두 손(臼)으로 무언가 배울 것(爻)을 펴들고 공부하는 모습이 비친다.
이 글자가 만들어진지 이미 수천 년. 그 때도 배움은 그렇게 이루어졌던 모양이다. 책상 앞에 뭔가를 붙들고 앉아 익히는 형태로…. 그래서 ‘배울 학(學)’자는 공부의 기본자세를 담고 있다고 설명되기도 한다. 공부하는 자리와 방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처럼 책상에 앉아 배울 것을 붙잡고 우직하게 파고드는 것이 변함없는 ‘면학의 기본자세’일 듯싶기도 하다.
요즘도 많은 학부모나 교육 관계자들이 그런 관점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학생들을 최대한 책상 앞에 붙들어 두고, 오직 책을 파도록 하는 것이 ‘공부의 왕도’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불안해 배기지를 못한다. 그래야 부모는 자녀들이 공부를 하는 듯해 마음이 놓이고, 교사는 책임을 다한 듯 안심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배움의 방식과 형태가 그 글자(學)를 만든 원시시대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공부에 대한 이 고전적 포즈는 언제까지나 면학의 기본자세로 모셔져야 하는 것일까. 건듯하면 ‘지식·정보화 사회’요 ‘문화의 시대’라는 21세기에도, 이것은 여전히 유효한 본보기일 수 있을까.
그래서 교육 관련자나 학부모들부터 교육의 본질에 대한 성찰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얘기들이 나오는 것이다.
지식정보화 사회로 들면서 당장 학력의 개념부터 바뀌고 있다. 배운 것을 얼마나 외워 쓸 줄 아느냐가 종래의 잣대였다면, 이제는 스스로 배우고 깨우치는 힘이 ‘진정한 학력’인 시대가 되었다. 산업화 사회가 기억력·이해력·적용력이 필요한 사회였다면, 지식정보화 사회는 사고력·탐구력·창의력·상상력 등 ‘자기 주도 학습력’을 요구하는 사회다. 그것이 석학들의 한결같은 예측들이다.
그런 능력들은 책상 앞이나 책 속에서만 찾아지지 않는다. 인간의 삶이 이뤄지는 모든 현장이 배움의 장이고, 인터넷·TV 등 모든 매체들이 교과서가 되는 시대로 들고 있다. 그래서 이젠 학생들을 더 이상 책상 앞에만 묶어두려고 해선 안 된다. 그것은 아이들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고 마는 길이다.
광야를 달릴 말을 고삐로 묶어두면 어떻게 될까. 그 고삐에 매이고 만다. 우리 속담에도 ‘명마(名馬)가 고삐에 상한다.’는 말이 있다. 고삐에 매인 말은 처음에는 벗어나려고도 해 보지만, 이내 좌절과 체념, 무력감에 길들여지고 만다. 그 말에게 더 이상 광야는 없다. 고삐를 풀어주어도 그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이들에게 세계무대의 주역이 되라면서 책상 앞에만 묶어두고,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지라면서 밤늦도록 학교에만 붙들어두는 눈먼 교육열의 고삐를 끊지 않은 채 우리 아이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어른들의 ‘공부에 대한 공부’부터 다시 필요한 이유다.
김병우/충북교육발전소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