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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으로] 비움과 채움

한기연 시인. 평생교육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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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7.10.30 16:52
  • 기자명 By. 충청신문
 
토요일 오후, 모처럼 화장을 곱게 하고 친구 남동생 결혼식에 갔다. 어릴 적 보았던 친구 남동생은 마흔 중반 넘어 다행히 짝을 만났다. 40년 지기 친구도 전문가의 솜씨로 단장하고 고운 한복을 입고, 문 앞에서 언니와 손님을 맞고 있었다. 하객 중에는 낯설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친구들이 종종 있었다. 식이 시작되기 전에 모임을 하는 친구들이 왔다. 서로 바빠서 모임도 몇 달을 미루고 있는데 이곳에서야 보게 된 것이다. 
 
식이 끝난 후 친했던 친구의 남동생이 커피를 마시자고 해서 친구들 몇 명이 함께 갔다. 여자 네 명의 끝도 없는 수다가 이어졌다. 남편 흉을 보는 듯 하다가도 끝까지 들으면 자랑이 덤으로 끼어 있다. 오십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가장 고민거리는 성년이 다 된 자녀들의 진로문제인지라 이야기의 중심도 그쪽으로 치중됐다. 친구 남동생은 교육계에 있는데 가끔 좌장처럼 자녀의 진로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나는 내 이야기를 했다. 석사논문을 쓰느라 정신없다는 둥 나이가 들어서 더이상 공부는 못 하겠다는 둥 결국은 은연중에 잘난 체를 한 것이다.
 
저녁나절 곰곰이 생각해 봐도 쓸데없이 잘난 체를 한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그런 상태에서 일요일 아침 보게 된 TV 다큐스페셜 ‘버리기의 기적’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작년에 방송됐던 것을 방송사 사정으로 재방영하고 있었다. ’버리기의 기적‘은 1부 물건이 사는 집과 2부 물건 버리기 프로젝트를 통해 네 가족의 모습을 다큐형식으로 구성해서 잘 버리고 잘 남기는 것이 삶에 가져오는 변화를 보여 주었다. 어린 자녀를 키우면서 장난감으로 가득 찬 집, 워킹맘의 정리 안 된 집, 버리지 못하는 친정엄마와의 갈등 등 네 가족이 치르는 갈등과 우울증의 고비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난주에 칠순의 친정엄마가 인공관절 수술을 하시고 입원하셨다. 친정 엄마도 물건 버리기를 싫어하셨다. 가끔 친정집에 가서 정리해 줄 때 수십 년 된 옷도 버리려고 하면 걸레라도 쓴다며 못 버리게 하셨다. 버리는 일로 자주 다툼이 생기다 보니 이젠 몰래 집으로 챙겨와 버리는 요령까지 생겼다.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 버릴 것과 남길 것이 구분이 되는 데 우리 집도 마찬가지이다. 버리는 물건도 쓸 만하면 집으로 가져오는 버릇이 내게도 있다. 
 
곁에서 엄마를 보고 자라서인지 나 또한 엄마를 쏙 빼닮았다. 공예 일을 하면서 더더욱 버릴 것은 없었고, 내용물보다는 빈 용기에 관심이 가서 그런 걸 보면 ‘저걸 어떻게 사용할까?’ 하며 주워 올 궁리를 한다. 정리정돈도 잘 못 하는 편이라 텃밭에 창고 안은 뒤죽박죽 엉켜 있고, 집은 거실까지 재료가 널브러져 있다. ‘버리기의 기적’에서 본 것처럼 마음까지 우울해지고 심란한 기분이다. 
 
엄마가 안 계신 한 달 동안은 친정집에 가서 틈틈이 버리려고 계획을 세웠다. 혼자 생활하시는 데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미련 없이 버릴 것이다. 이참에 우리 집도 물건 버리기 프로젝트를 과감히 실행해 봐야겠다. 내게는 물건뿐 아니라 버릴 것이 또 하나 있다. 배우면 배울수록 자숙하고 겸손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많은 말을 하다 보면 은연중에 과시하고 있었고, 욕심이 지나쳤다.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은 공부 다 하면서 남편에게 짜증도 많이 부리고 소홀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이제는 쉬엄쉬엄하고 싶다. 자식들이 외지에 나가 각자의 삶을 준비하고, 홀로 버섯을 따러 가거나 술을 마시며 보내는 남편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내 삶의 비중에서 욕심을 버리고 남편과 함께 하는 시간을 채워 나가야 할 때인가 보다.
 
푸릇했던 여름의 빛깔에서 가을 단풍으로 물들며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나뭇잎이 겨울을 나고 새 봄을 준비하는 것처럼 삶도 비워야 비로소 채워지는 것이리라. 오늘 결혼한 부부는 나보다는 현명하게 삶의 비움과 채움을 완성해가면서 행복하기를 바라본다.
 
한기연 시인. 평생교육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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