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세상사는 이야기] 황금호박

변정순 음성수필문학회 회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입력 : 2019.11.26 14:30
  • 기자명 By. 충청신문
여름내 변변한 호박 하나 따먹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찬바람 부니 성성하게 덩굴을 뻗고 열매를 맺어 잘 익은 누런 호박 한 덩어리를 땄다. 시일이 짧은데도 기후가 잘 맞아서인지 신통방통 잘 영글었다. 요 녀석을 끌어안고 한참을 닦고 또 닦고 흐뭇해 하다가 올겨울 어떤 요리를 해볼까, 아니면 집안을 꾸미는 장식용으로 쓸까 행복한 고민을 했다.

호박은 참 쓸모가 많다. 애호박일 때는 둥글납작하게 썰어서 전을 부치기도 하고 새우젓 호박찌개도 만들고 채 썰어 삶은 국수에 넣어 먹고, 더 자란 것은 데쳐서 무쳐먹기도 한다. 줄기 끝자락의 연한 이파리는 쪄서 쌈으로 먹고, 열린 호박을 다 먹지 못할 때는 가을빛에 썰어 말리면 뽀얗게 마르면서 호박고지가 된다.

늙은 호박은 호박죽, 김치 넣은 호박 국, 호박범벅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누렇게 잘 익은 호박을 넣어 끓인 쇠죽을 소에게도 먹였고, 간혹 호박씨를 발라 사랑방 아랫목에 널어 말려 까먹던 유년의 기억도 떠오른다. 잘 말린 호박씨는 겨울철 간식이 되고 어머니는 늙은 호박을 잘라 껍데기를 벗겨 처마 밑에 매달아 말렸고 이렇게 말린 호박고지로 떡을 만들어 주셨다.

나는 시루떡 속에 누런 호박고지가 들어있는 것을 싫어했고 호박을 넣고 끓인 김칫국도 먹지 않았는데 이제는 식성이 바뀌어서 호박죽과 호박떡을 좋아하여 잘 먹는다. 그때의 우리 부모님 나이가 되기도 했지만 식성도 건강을 염려해서 변해지는 것 같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수다 떠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마음과 행동이 변해가는 것 같다. 모습은 말할 것도 없다. 늘 새롭게 도전하고 시작하며 실행에 옮기며 열정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던 걸까. 오십 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매사 조심스럽고 멈칫거려진다. 나이는 세월이 가면 저절로 먹어가지만 먹는 나이 값을 하며 산다는 일이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잦은 모임을 갖는 편이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 나이 차도 많이 나지만 사회적으로 높은 학식과 덕망도 뒤로하고, 비슷한 성향의 시어머니 흉보기, 남편 흉을 보면서 은근히 자랑하기, 자식 자랑하기, 거의가 우리 삶의 이야기로 마음을 터놓는다. 나이 들면서 좀 변한 것이 있다면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사람도 말이 빨라지고 많아졌긴 하지만 각자의 최고의 며느리, 아내, 어머니, 할머니로 살며 집안의 모든 걸 다 헤쳐 나가는 만능 텔런트 란 생각이 든다. 그냥 살아가는 자연스런 모습인데 자신만만한 이들의 용기가 부럽다. 어떨 땐 덩달아 수다의 극치를 달려 내 마음이 힐링되니 전문가 못지않은 수준의 상담자들이기도 하다.

애호박은 애호박대로 늙은 호박은 늙은 호박대로 쓰임이 다르다.

우리도 어릴 땐 어린 모습 그대로 순수하고 귀엽고 예쁘고, 중년은 중후한 멋과 성숙함이 빛나고, 노년에는 수많은 세월을 살아와 황금호박처럼 깊은 삶과 지혜로움이 있을 터, 노력 없이 그냥 아름다워지진 않는 것 같다.

흔히 예쁘지 않은 여자를 보고 "호박꽃도 꽃이냐"고 빈정거린다. 호박은 열 마디만 넘으면 흐드러지게 꽃을 피운다. 너무 흔한 것이 호박꽃이라서 그렇게 조롱하는 것 같다. 하지만 호박꽃을 자세히 살펴보라. 밤하늘의 별을 닮은 모양이 우리 중년 여성들의 품성이 느껴져 여유까지 있지 않은가.

요즘은 서로 삶이 바빠서 호박꽃을 닮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도 뒤로하고 있다. 하지만 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우리 황금호박들은 미루어만 오던 여행을 통해 호박꽃 같은 이야기꽃을 또 피울 것이다.

우리 집 황금호박, 보면 볼수록 매력이 넘친다.

저작권자 © 충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충청신문기사 더보기

하단영역

매체정보

  • 대전광역시 중구 동서대로 1337(용두동, 서현빌딩 7층)
  • 대표전화 : 042) 252-0100
  • 팩스 : 042) 533-7473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황천규
  • 법인명 : 충청신문
  • 제호 : 충청신문
  • 등록번호 : 대전 가 00006
  • 등록일 : 2005-08-23
  • 발행·편집인 : 이경주
  • 사장 : 김충헌
  • 「열린보도원칙」충청신문은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 노경래 (042-255-2580 / nogol69@dailycc.net)
  • Copyright © 2024 충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ilycc@dailycc.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