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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포럼] 백제 유민들이 중국, 당나라와 싸운 이유…

이재준 건양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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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0.02.13 15:04
  • 기자명 By. 충청신문
이재준 건양대학교 겸임교수
이재준 건양대학교 겸임교수
요즘 중국 우한폐렴으로 온 나라가 혼란스럽다. 이 신종 전염병의 근원지가 중국 허베이성, 우한시에서 발생하여 최초 우한폐렴으로 불렀다. 그러나 지금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부르고 있다. 사스나 메르스와 같은 코로나 바이러스인데 신종이라는 명칭을 덧붙였다. 우한이라는 지역명칭이 중국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정부의 의도로 추정된다. 물론 현 정부의 친중 행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국민의 안전을 위한 중국인 입국금지 조치 등 초기대응이 부진했던 것은 중국눈치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중국에 당당했던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자.

1300여 년 전인 660년 백제는 18만여 명이나 되는 나당연합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지 10일 만인 7월 18일 무릎을 꿇어야 했다. 강대했던 백제가 그렇게 짧은 순간에 무너진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8월 2일 거행된 의자왕의 항복례로, 찬란하고 섬세한 문화를 자랑하며 700여년을 이어온 백제의 운명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백제는 그대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660년 8월 충남 예산의 임존성에서 3만여 명의 백제 유민들이 들고 일어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여 사비성에 주둔한 당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3년 4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전쟁을 이어갔다.

당시 전쟁을 주도하고 이끌어갈 왕족이나 귀족, 지방 수령 등 약 2만여 명이 당으로 압송된 상태였다. 전쟁을 뒷받침해줄 국가도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백제 유민들은 동아시아의 최강자 당나라에 맞서 전쟁을 계속한 것이다. 이 전쟁을 우리는 백제부흥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백제 유민들은 왜 전쟁을 결심했고 죽음을 무릅쓰고 그렇게 오랫동안 당나라와 싸웠을까?

백제 유민들이 중국, 당나라와 목숨을 걸고 싸운 이유는 중국 측 사료에 잘 기록되어 있다. 당시 백제부흥군의 총사령관이자 승려였던 도침(道琛)대사는 부여 사비성에 주둔하고 있던 당나라 장수에게 서신을 보냈다. “당과 신라가 약조하기를, 백제를 격파하면 백제인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젖먹이까지 다 죽인 다음 나라는 나누어 갖기로 했다고 들었다.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어찌 싸우다 죽는 것과 같겠는가? 그래서 똘똘 뭉쳐서 싸우는 것이다.” 당나라 역사서인 구당서와 신당서에 실린 도침대사의 글은 백제 유민들의 싸우는 목적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서신을 받은 당나라 장수 유인궤가 답신을 보내 왔으나 도침은 사신의 직급이 낮다며 임존성 안으로 들이지 않고 답서도 주지 않은 채 돌려보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백제부흥군들은 부모와 처자식이 앉아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당히 당나라와 싸워 나라를 되찾고자 했으며 가족들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도침은 당나라의 사자를 만나 협상할 수도 있었으나 아예 만날 생각조차도 안했다. 즉 강한 의지와 힘만이 내나라 내 가족을 지킬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당나라의 사자를 그냥 돌려보냈던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 열전 최치원 문집에는, 그가 당나라 태사시중(太師侍中)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백제 유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삼가 듣건대… 한때 해동(海東)에 있던 고구려는 강성하여 중국의 북쪽 연·노·제나라를 괴롭혔고, 백제는 중국의 남쪽 오·월나라를 침범하여 중국의 큰 좀이 되었다… 660년에 이르러 당 고종황제가 백제를 멸하고 그 지역에 부여도독부를 설치하여 중국인 관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백제 유랑민들은 중국인과 맛과 취미가 달라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최치원은 통일신라 말기인 857년에 태어났으니 백제 멸망 후 약 200여 년이 지난 시대의 사람이다. 그의 서신에 의하면 백제가 중국을 점령할 정도로 강성했으며, 말년의 백제부흥전쟁이 2세기 이상 전해질 정도로 치열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비록 백제 유민들이 당나라 사람들과 맛과 취미가 달라 반란을 일으켰다고 했으나 사실은 당나라 사람, 즉 중국 사람이 이 땅에 들어온 것 자체를 거부했던 것이다.

또한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는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기공비에는 “당나라 도호(都護) 유인원이 백제 유민들의 마음 편하게 접대해 주는 것이 그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 그러나 반역을 도모한 이가 있으니 가짜승려 도침과 가짜장군 복신(福神)이다. 그들은 민간에서 나와 우두머리가 되어 우리 당나라 군대를 공격해서 포위하였다. 주야조석(晝夜朝夕)으로 계속해서 침범하면서 스스로 망한 것을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잇는다고 하며…”라고 적고 있다.

663년 당대에 제작된 금석문에서도 백제 유민들이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왕조를 잇기 위하여 싸운다는 것을 적시하고 있다. 그리고 백제부흥군의 공세가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당대에 작성된 금석문이니 백제 유민들이 싸운 목적이나 그 전장상황에 대한 신뢰도는 높을 것이다.

이와 같이 백제 유민들이 당시 동아시아의 최강자 당나라와 맞서 3년 4개월간이나 치열한 전쟁을 벌인 이유는 나라를 구하고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고자 했음이며, 그 목적은 이 땅에 들어온 중국인 즉 당나라 사람들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이었다.

요즘 우한폐렴에 대응하는데 있어 정부의 중국눈치 보기를 보면서, 나라를 위하고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고자 했던 백제 유민들의 정신을 상기해 주고 싶다. 거대 중국 당나라에도 당당했으며 전쟁도 불사했던 백제 유민들의 자세를 되새기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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