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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벗이 되고 곁이 되는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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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2.04.05 14:42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토요일 오후 앞집에 사는 할머니께서 봄나물 한 바구니를 주셨다. 푸릇푸릇 푸른 기운이 도는 싱싱한 냉이와 달래였다. 그러잖아도 요즘 입맛이 없어 오늘은 무얼 먹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냉이는 냉이대로, 달래는 달래대로 근처 마트에서 손쉽게 사다 먹는 나물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그 향이 깊고 진했다. 역시 시골의 봄은 꽃보단 나물이라는 말이 제격이다.

할머니 덕택에 저녁 준비에 속도가 붙었다. 우선 쌀을 씻을 때 남겨두었던 쌀뜨물에 집된장 몇 숟가락을 풀고 깨끗이 다듬은 냉이를 넣어 된장국을 끓여냈다. 순식간에 향긋한 냉이 향이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된장국만 끓이기에는 그 양이 많아 조금 남겨서 냉이 튀김도 만들었다. 달래는 곱게 다져 각종 양념과 섞어 장을 만들었다. 지난 오일장에 나가 사 두었던 파래김을 꺼내 석쇠에 굽고 달래장을 곁들일 생각을 하니 절로 입맛이 살아났다.

곧바로 냉이 튀김 한 접시와 달래장을 들고 할머니 댁 초인종을 눌렀다. 할머니께서는 그새 반찬을 만들었냐며 오늘 일이 적잖이 고단해 아직 저녁도 못 했는데 잘 먹겠다며 세월이 내려앉은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반갑게 받아든다. 그 모습에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던 해에 이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그 아이가 자라 어느새 성인이 되고 군 복무 중이니 꽤 오래 이곳에서 살았다. 옆집 할머니도 비슷한 시기에 이곳에 둥지를 틀고 서로 이웃이 되었다. 나는 초등생 아이를 둔 직장인 엄마였고, 옆집 할머니는 가정용 보일러를 설치하는 일을 하는 회사원이자 아직 결혼하지 않은 아들과 단둘이 사는 살림하는 할머니였다. 그리고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밭을 일궈 소소한 먹거리를 직접 키워 먹는 일을 낙으로 사는 부지런한 분이셨다.

처음 몇 년은 서로 그냥저냥 데면데면 대했다. 간혹 아침저녁 출퇴근 시간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면 고개만 살짝 숙일 정도로 눈인사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파릇파릇 시골 들판에 봄이 올라오길 수년째, 몇 해 전부터 점차 이것저것 먹거리를 나눠 먹는 사이가 되었다. 봄이면 오늘처럼 밭두렁에 지천인 쑥이나 달래, 냉이를 뜯어 나눠주시고, 여름이면 온갖 싱싱한 채소를 다듬어 비닐봉지에 담아 현관 문고리에 걸어놓기도 하셨다.

처음엔 그런 호의에 익숙하지 않아 불편했다. 집 근처에 마트가 있어서 주말마다 필요한 물품을 계획에 맞게 구매해서 생활하는 나로서는 필요 이상의 채소가 그리 반갑지 않았다. 또한, 받으면 답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고민하는 것도 때로는 스트레스였다. 그러나 점차 나도 나이를 먹어보니 점점 소탈해져 가고 나날이 굽어가는 할머니의 허리를 보면 친정엄마가 생각났다. 그런 이유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주시면 감사하게 받고, 잘 먹었다는 인사와 더불어 소소하게 할머니의 일상에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도움을 드리기로 했다.

할머니께서 목욕용품을 챙겨 엘리베이터에 서 계시면 동네 목욕탕까지 차로 모셔다드리고, 아들이 며칠씩 회사에서 출장을 간다고 하면 중간중간 초인종을 눌러 잘 계신지 근황을 살핀다. 오일장이 열리면 함께 나란히 장 구경을 다녀오고 길을 가다 맛있는 빵집을 보면 할머니를 생각한다. 내가 할머니의 일상에 관심을 가지면 내 부모 또한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다. 서로에게 벗이 되고 때로는 곁이 되어주기도 하는 이 인연이 아주 길었으면 좋겠다. 할머니와 이웃으로 만나 서너 걸음 남짓 현관문을 서로 사이에 두고 오늘도 냉이와 달래로 주고받는 소소한 일상의 정(情)이 이 봄날 저녁상을 풍성하게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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