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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속으로] 일체유심조

이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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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2.04.11 14:36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이혜숙 수필가

집 뒤편 야생화밭에 나가보았다. 겨울을 지나고 있는 밭이 황량하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낙엽 속에서 여린 새싹이 뾰족이 나오고 있다.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변화하는 계절이 부럽다.

새싹들이 땅을 헤집고 나오려 하는 계절이다 보니 땅의 기운이 흩어져서일까. 내 몸의 기운도 흩어지는지 힘이 없고 이곳저곳이 아파온다. 봄마다 겪는 일이다. 작년 초부터 손가락이 아프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팔까지 쑤시고 밤에는 마비가 온다. 잠을 설치기도 하고, 자다 일어나 손을 주무르기도 해야 한다.

옛날 어른들이 손목에 병이 나서 고생하는 것을 보았는데 내가 그러고 있다. 손목부터 손가락 끝까지 아프기 시작한다. 아프기 시작하면서 손녀 양육이 시작되었기에 병원에 가서 주사 한 대를 맞고 견뎠다. 어른들은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고 했는데 갈수록 태산이다. 물병 뚜껑 따기도 힘들어졌다.

새싹은 봄이 왔음을 알리고 기지개를 켜려고 하는데 나는 겨울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것 같다. 이렇게 방치하면 안 될 것 같다. 나와 같은 증세로 고생했다는 지인에게 전화해 수술 후 상태를 알아보고 병원도 알아보았다. 연속적으로 심한 통증 때문에 빨리 수술을 해야겠다고 의사도 아니며 진단을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몸이 허약했던 것 같다. 개근상을 한 번도 탄 적이 없다. 병이 나서 결석을 했기 때문이다. 약방을 하셨던 아버지의 극진한 간호에도 삼일 정도 앓고 나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딸들은 귀한 대접을 받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아버지는 세상에 없는 딸처럼 귀하게 여겼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존댓말을 해 본 적이 없는 응석받이요 철부지였다. 약 진열장에 넣어둔 원기소를 몰래 꺼내 먹어도 화를 내거나 꾸중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약방을 하실 때만 해도 공의가 없던 때라 왕진도 가시고 아기도 받고 지금 생각해 보면 동네 궂은일을 참 많이 하신 것 같다. 나중에 보건소가 생기고 아버지는 정식 자격증이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면서 손을 떼셨다. 아마도 열악한 고향에 의사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공부하시고 약방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을 얻으셨나 보다. 나는 그렇게 보호를 받아 왔기에 병원에 가서 몇 분 정도밖에 볼 수 없는 진료에 늘 불만이었다.

진천에 있는 병원이 잘한다고 해서 갔다. 신경외과는 없고 정형외과에서 진료를 본다고 한다. 접수하고 한 시간 반을 기다려 의사를 만났지만, 엑스레이를 찍고 가서 삼 일 후에 근전도 검사를 하란다. 당장 하면 안 되냐고 했더니 예약이 밀려서 안 된단다. ‘환자만 답답하고 급하지 뭐’ 속으로 투덜대며 집으로 올 수밖에, 3일이 지난 후 근전도 검사하고 다음 날 진료 예약을 하고 다시 집으로.

기분이 나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같은 동네도 아니건만 진료 보기까지 네 번이나 와야 하는 불편에 구시렁거리며 서울로 갈 걸 하는 후회도 했다. 아기가 있으니 장거리가 부담스러워 이웃 동네 병원을 택한 건데. 한겨울을 지나 봄이 오려는데 벌거벗은 나무 사이로 윙윙거리며 바람이 지나간다. 답답한 내 마음은 세차게 부는 바람 소리가 오히려 시원하게 들린다.

드디어 의사의 진료가 있는 날이다. 시간 맞춰 병원에 도착하니 환자 진료 중이다.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조금은 불편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코로나가 심하니 병원에 오래 머무는 것도 부담스럽다.

뜻밖에 바로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손목터널 증후군. 예상한 병명이다. 수술 날짜를 잡으려 마음먹고 있는데 의사의 자세한 설명이 이어진다. 컴퓨터를 열어 증세가 말해주며 터널이 어떤 것이며 신경이 눌려서 그런 거라고. 중증이 아니라 경증이니 우선 약을 먹고 시간을 두고 증세를 보자고 한다. 수술은 간단하지만 눌린 신경을 끊어내야 하는데 한번 수술하면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 지켜보잔다. 두 주먹 불끈 쥐고 살아온 결과인가. 두 손으로 잡은 것이 너무 많았나. 삶의 흔적을 뒤돌아본다.

지난번에 왔을 때 오래 기다렸다고 구시렁댔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30분 정도를 자세한 설명과 더불어 환자의 마음을 다독이는 의사의 자상함 때문인가 보다. 자주 아프다 보니 병원을 들락거렸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을 할애해 주는 의사는 처음이다. 자기 가족을 살피듯 자세하게 설명하며 알려주니 통증이 일순간에 없어지는 것 같다.

약 처방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렇게 쑤시고 아파 운전하는 내내 손가락을 주무르던 나는 통증이 일시에 사라진 듯 가벼웠다. 몇 달 동안 했던 고민이 일시에 사라지는 느낌이랄까.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는 다 똑같이 했을 텐데 왜 의사들이 다른 것일까. 일체유심조라더니 날아갈 듯 몸과 마음이 가볍더니 콧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며칠 후 건강검진을 하러 찾은 청주 모 병원. 검사를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이 중얼거리며 성의 없이 내뱉는 말을 들으니 진천의 그 의사가 더 고마웠다. 내 아버지 이후 가장 편안하게 해 준 분. 다음에 진료하러 갈 때 커피 한잔 들고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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