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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잊혀지는 것

서필 목원대 교수·테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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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2.08.23 16:38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서필 목원대 교수·테너

필자는 대학교에서 학생 오페라를 매년 지도한다. 겨울방학부터 거의 반년 가까이 연습해서 무대에 올리는 과정이다 보니, 그 어떤 연주보다도 연주자들의 표정이 오랜 시간 훈련되어 자연스럽고 예쁘다. 그래서 영상이나 홍보물을 만들기에도 좋은 표정이 많고 장면의 완성도도 높다.

작년까지만 해도 작품을 하나 끝내면 메이킹 필름을 만들거나 홍보물에 삽입될 연습 사진을 구하기가 매우 쉬웠다. 학생들이 각자의 스마트폰으로 시시각각 장면과 순간을 담아내고 있어, 연주가 끝나면 이것저것 다양한 설정을 부여하며 써먹을 사진이 무척 많았다. 그래서 공연 리허설과 실황을 작가가 전문적으로 찍은 사진은 그 자체로 소중한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높지만, 그에 못지않게 학생들이 쉴 새 없이 찍어대는 사진과 동영상들 또한 매우 유용했다. 무대 소품의 소재파악이나 기기 설치방법, 제작 과정을 유추하거나 개선할 때 그만한 기록이 없었고, 예상치 못한 기발한 콘텐츠를 발견하기에도 그만이었다. 그렇게 거의 모든 방면에 조선왕조실록 마냥 세세한 기록이 넘쳐났다.

올해 오페라를 준비하며 메이킹 필름에 쓸 자료사진 수집을 위해 작년 오페라 자료사진이 필요했다. 학생들에게 쓸만한 사진이 있겠거니 공연 기간에 찍은 사진을 학생들에게 수배를 걸었는데 돌아오는 사진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매일매일 SNS에 그 막대한 사진들과 동영상을 쏟아냈음에도, 쓸만한 게 거의 없을 정도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매일 매일, 그것도 하루에도 몇 번씩 사진과 동영상을 SNS에 올리는데, 자신이 스마트기기로 찍어놓은 사진을 SNS로 업로드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 SNS 애플리케이션 자체에서 직접 지원하는 다양하고 재미있는 동영상형식과 사진 양식으로 촬영해서 바로 게시물로 올리는데, 이건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삭제된다. 앱에서 바로 찍은 것이라 기기에는 남아있지 않다 보니 매일매일 넘쳐나는 사진과 동영상이 있었음에도 정작 남아있는 것이 없다. 전부 날아가 버린 것이다.

요즘 MZ 세대가 열광하는 콘텐츠 양식, 숏폼(Short-form: 짧은 동영상)과 휘발성 콘텐츠(Ephemeral content: 일정 시간 후 소멸하는 콘텐츠)의 이야기다.

이탈리아 로마 유학 시절, 이탈리아 사람들이 하던 이야기가 있었다.
“한국인들은 등으로 관광을 하는 것 같아”
유적과 기념물들을 눈으로 즐기고 담아내는 대신, 관광지를 배경을 등지고 사진찍기에만 몰두하는 행태를 비꼬던 말이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기록문화, 조선왕조실록의 후예답게 ‘그래도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라며 사진을 찍어대던 이전세대와 달리, 요즘은 적당히 잊히는 것을 선호하는 모양새다. 그도 그럴 것이 잘못 찍힌 영상이나 사진이 ‘흑역사’ 취급되며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세태를 보고 나니, 즐길 것은 즐기되 끝까지 남는 것은 부담스러운 MZ 세대의 요구와도 잘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정받고 사랑받고 기본 욕구가 있는지라, 또 그런 방식 안에서 사람들과 나누고 소통을 하려 하니, 결국 매일매일 날아가 버릴 콘텐츠를 더 자주 올리게 되고, 그러면서 다른 친구들의 소식도 놓치지 않기 위해 더 자주 접속하여 살핀다. FOMO(Fear of missing out) 현상, 즉 좋은 기회나 재미있는 장면 등을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다들 하고 있는데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닐까 두려워하는 또 다른 형태의 사회현상이 나타난다. 그래서 이전보다 훨씬 더 자주 접속한단다.

하긴 유명 연예인이 지하철을 애용한다고 하자 사람들이 알아봐서 불편하지 않냐는 질문에 모두 전화기만 보고 있어 그럴 일이 없다던 대답이 격하게 납득이 된다. 우리는 예전보다 더 자주, 오랜 시간을 현실보다 사이버 세계에 머문다. 커피숍에서도, 쉬는 시간에도, 심지어 집에서도.

만일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쳐다보지도 않고 귀에 아무것도 안 꽂힌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두 가지 중 하나일 거다.

전화기가 방전되었거나, 하필 그때 걸린 스마트폰 운영체제 업데이트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세일 거라고.

그렇게 소소한 일상들도 잊히는 중이다. 귀갓길 운전 중에도 창밖의 풍경보다 라디오나 팟캐스트 내용이 더 기억에 남아 근처에 새로운 점포가 생긴 걸 나중에야 알게 됐다.

넘쳐나는 것이 많을수록 더 많이 잊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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