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회에서 피아니스트 옆에 앉아 악보를 넘기는 사람을 ‘넘순이’라고 한다. 페이지를 넘겨준다는 ‘페이지 터너’라는 용어가 있지만, 여초현상이 압도적인 국내 피아노과의 특성상 주로 같은 피아노과 여학생이 페이지를 넘겨주는 경우가 많아 통상 ‘넘순이’로 지칭한다. 능숙한 곡이라면 연주 중에도 재빠르게 한 손 공백이 있을 때 넘기곤 하지만, 어렵고 빠르면 그것도 어려운 데다 페이지 두세 장이 한꺼번에 넘어가기도 해서 페이지 터너는 꼭 필요하다.
필자가 대학생 때 가장 많이 땀을 흘렸던 일화가 있다. 작곡 전공 졸업연주회 무대 쪽 ‘기도’라고 부르던 무대 뒤 등·퇴장 진행을 맡았던 일이 있었다. (이 ‘기도’ 역시 문지기를 뜻하는 일본어 잔재다. 35년 일제 강점기 영향은 이토록 크다)
당일 넘순이를 맡은 피아노과 선배가 사정이 있어 나오지 못하게 되자 순서가 다가온 반주자가 내게 ‘넘돌이’를 부탁했다. 당시 신입생이던 필자가 생전 처음 보는 어려운 악보를 타이밍 맞춰 넘겨야 하니 한사코 거절했지만 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악보를 넘길 타이밍이 되면 피아니스트가 고개를 살짝 ‘까딱’ 하는 걸 사인으로 삼아 무대에 들어갔다.
페이지 터너는 은근히 신경 쓸 게 많다. 피아노 주자 왼쪽에 앉아있다가 악보를 넘겨줘야 하는데, 앉은 상태에서 오른손을 뻗으면 악보 하단을 팔로 가리게 된다. 그래서 때가 되면 ‘일어나서’, ‘왼손으로’, ‘악보 위쪽에서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
문제는 피아니스트가 고개를 ‘까딱’하는 게 페이지를 넘기는 것 말고도 다른 경우가 있는데, 일정 부분 쉬었다가 호흡을 맞춰 악기 주자들과 다시 시작하는 부분에서도 ‘까딱’ 신호에 맞춰 들어간다는 점이었다. 악보 보랴, 반주자 고개 보랴, 땀은 비오듯 흐르고 결국은 페이지를 넘기는 순서가 아닌 엉뚱한 부분에서 페이지를 넘겨버려 반주자가 사색이 되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기까지. 순서가 끝나 땀에 흠뻑 젖어 무대를 나오니 지켜보던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누가 보면 너 독창회 한 줄 알겠다”
그 후론 한동안 연주를 보러 가면 넘순이만 보였다. 연주자보다 돋보여선 안 되기에 검은색 옷을 입어야 하고, 연주자가 아니기에 같이 무대인사를 해서도 안 되고, 연주자보다 조금 떨어져 입장해서 연주자 인사할 땐 한 발짝 뒤로 떨어지는 것까지. 돋보이진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기에 유명 피아니스트들은 작품을 잘 알고 있는 전문 페이지 터너를 데리고 다니는 일도 있다.
페이지의 악보 단 구성이 애매하거나 빠른 곡일 경우는 종이를 넘기는 것도 위험할 때가 있다. 이 경우엔 피아니스트가 아예 악보 예닐곱 장을 병풍처럼 한 폭으로 쭉 이어붙인다. 그렇지만 이 경우도 한 폭짜리 악보 자체가 종이 무게를 못 견뎌 통째로 건반 쪽으로 넘어지는 사고가 종종 일어난다. 그 어떤 경우라도 무대에선 대형사고다.
그러다 태블릿 PC가 등장했다. 국내에선 2011년 12월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베토벤 합창 4악장을 태블릿 PC 전자악보로 연주한 게 공식적인 기록이다. 당시 손열음은 맘에 맞는 페이지 터너랑 매번 만난다는 보장도 없는 데다, 낯을 가려서 페이지 터너가 옆에 있으면 오히려 신경이 쓰여 혼자 넘길 수 있는 전자악보를 사용했다는 인터뷰 기록을 남겼다.
며칠 전 SNS를 들춰보다 유독 음악전공생들에게 댓글이 많은 높은 쇼츠(짤막한 동영상)가 눈에 띄었다. 작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퍼스트 라운드에 나선 첼로의 마르셀 요한네스 키츠의 경연순서였다. 당시 피아노 반주였던 소노다 나오코도 종이 악보가 아닌 태블릿 PC를 사용했는데 곡이 3분의 1정도 진행된 부분에서 갑자기 피아니스트 손이 바빠졌다. 태블릿 PC에 오류가 생겨서 화면이 먹통이 된 것이다. 워낙 호흡을 많이 맞췄는지 왼손은 기억에 맞춰 흘러가지만, 오른손은 바쁘게 화면을 두들기는데 화면은 자꾸 다른 게 나왔다. 15초가량이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소름이 돋는다.
이 영상의 베스트 댓글은 다음과 같다.
“모든 피아니스트의 악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