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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기다림

정관영 공학박사·우석대학교 건축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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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3.12.17 13:45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정관영 공학박사·우석대학교 건축학과 객원교수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기다림을 통해 우리는 서로 만나고 기다림으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그러기에 기다림은 아름다운가 보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 중에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구절이 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긴 기다림이 있었다. 기다림으로 인생의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인생의 길이 열리고, 기다림을 통해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나간다. 그래서 인생은 기다리며 사는 존재인가 보다.

아기가 어머니 복중에 생겨나면, 세상에 나갈 날을 기다린다. 아기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기다린다. 대학을 졸업하면, 짝을 기다리고 결혼하면, 아내는 직장에 간 남편을 기다린다. 직장에서는 진급이 되기를 기다린다.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기다리며 산다.

‘대추 한 알’의 시에서도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 붉게 익히는 것일 거다.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 있어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거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이렇듯 자연은 언제나 일련의 과정에 충실하다.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일련의 과정을 모두 겪고 나서야 비로소 눈앞에 드러나는 결실, 과정을 겪지 않고 결과만을 위해 급하게 달려가다 보면 그만 잊고 만다. 무엇을 위해 지금 이렇게 달리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불안에 떨어야만 하는지. 작은 대추 한 알에 깃든 기나긴 인고의 시간. 기다림이 빨갛고 아름다운 대추 한 알을 빚어낸다.

유년 시절 초등학교 4학년 때로 생각된다. 담임선생님께서 학생 모두에게 토마토 씨앗을 나누어주셨다. 그러시면서 잘 키워 학기 말에 화분에 담아오라고 하셨다. 시골에서 마침 텃밭에 황토와 굵은 모래가 있어서 닭 배설물과 섞어서 화분에 채웠다. 그리고 물을 붓고 씨를 심었다. 며칠이 지나자 싹이 나왔다. 한 달 보름쯤 지나자 제법 그럴듯한 토마토 모종이 되었다. 화분에 지주를 박고 모종을 묶어주었다. 그리고 매일 물을 주고 정성을 쏟았다. 씨앗을 심은 지 세 달이 지나자 밑동부터 조그마한 초록의 토마토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넉 달이 되자 윗부분까지 토마토가 달렸다. 학기 말에 토마토가 주렁주렁 달린 화분을 선생님께 제출했더니 장하다며 칭찬을 해 주셨다. 어린 시절이지만 이때 참 귀한 것들을 배웠다. 그중에 하나가 기다림이다. 토마토 한 알을 먹기까지 무려 넉 달이 넘는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긴 기다림 동안 많은 수고와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기다림의 열매인 토마토가 얼마나 귀한가를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더욱이 장성한 아들이 어엿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결혼하지 않아 속이 타들어 갔다. 하지만 아들을 믿고 기약 없이 기다렸다. 나이 40이 넘어서야 배필이라며 참한 규수를 인사시켰다. 너무나 흡족하고 기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식을 올렸더니 아기가 잉태되었고 새달에 탄생을 고대하고 있다. 그동안의 기다림에 만감이 교차 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 이 시대의 가장 실감하는 것은 단연 ‘속도’(speed)일 것이다. 우선 모든 것이 너무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조금만 머뭇거리거나 늑장을 부리면 어느새 뒤처져 버리고 만다. 다음으로 빠른 것이 가치 있게 여겨진다. 택배보다 퀵서비스를 사람들은 선호한다. 일 처리가 빠른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으로 대접받는 세상이다.

말의 세계에도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란 말이 등장하였다. 환경에 잘 적응한 자들이 살아남는다는 말이다. 변화가 다양하니 일부 영어가 조합된 신조어도 남발되고 있다. 남보다 빠른 자가 살아남는다는 말이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거에는 ‘품질 경쟁’(quality competition)이란 말이 통용되었다. 품질로 경쟁한다는 말이다. 오늘에는 ‘속도 경쟁’(speed competition)이란 말이 가세하여 따라다닌다. 이런 시대를 살면서 사람들은 과거와 다른 성격적 특성을 나타내게 되었다. 조급함이다. 워낙 세상이 빠르게 변하다 보니 어느새 적응되어 매사를 ‘빨리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서두른다. 그리고 불안함이다. 속도 경쟁 속에 내몰리면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마음이 늘 불안하다. 이렇듯 기다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힘들고 고통스럽다. 조급함과 싸워 이겨야 하고 불안감과 싸워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은 기다림을 견디지 못한다. 기다림을 싫어하고 심지어 피하려고까지 한다. 그러나 기다림은 비록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복되고 귀하다. 기다림을 끝까지 인내하고 이루어 낸 사람들은 큰 기쁨을 누리게 된다.

기다림이 그 과정에서 고난이 있지만, 그 고난은 헛된 고난이 아니고 의미 있는 고난이요 복을 잉태하는 고난이기 때문에 기다림 자체가 아름답다.

자연에서 열매를 얻으려고 하면 기다림이 없으면 안 된다. 씨앗을 뿌린 다음 물을 주고 가꾼다. 그런 다음 기다리는 중에 어느 날 싹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된다. 씨앗에는 무한한 미래가 담겨있지만, 기다리지 못하면 열매의 결실을 볼 수 없다.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오랫동안 기다리면서도 기대감에 차 있다.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는 물고기 입질을 생각하며 기다림 그 자체를 즐기고 있다. 그러다가 입질이 느껴지는 순간 희열을 맛보며 낚싯줄을 끌어당긴다. 기다림에는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기다림을 천착한 어느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삶의 계절은
기다림의 고통, 멋, 그리움이지 않은가?
기다림은 생명, 희망이지.
우리네 삶은 기다림의 연속인데
어느 날인가
기다릴 이유가 없을 때
떠나는 것이 아닌가?

우리네 가슴은 일생을 두고
기다림에 설레는 것,
기다릴 이유가 있다는 것,
기다릴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한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너무 빠른 변화의 물결 속에서 또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어느 물결에도 사람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새해에는 변화의 격랑 속에서도 기다려 보는 마음의 의지를 함께 고대해 본다. 새해 갑진년을 기다림의 철학으로 따듯하게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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