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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들머리] 조선왕조실록에 오른 인물 추사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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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4.01.23 17:32
  • 기자명 By. 충청신문

“전 참판(參判) 김정희(金正喜)가 죽었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金魯敬)의 아들로서 똑똑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金石文)과 도사(圖史, 옛 그림을 모아놓은 책)에 깊이 통달하여 초서(草書)·해서(楷書)·전서(篆書)·예서(隷書)에 있어서 참다운 경지(境地)를 신기하게 깨달았었다. (중간 줄임) 젊었을 때는 이름을 드날렸으나, 중간에 화를 만나서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귀양가서 온갖 풍상(風霜)을 다 겪었으니, 세상에 쓰이고 혹은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고 또는 물러갔음을 세상에서 간혹 송(宋)나라의 소식(蘇軾, 소동파, 중국 북송 때 최고의 시인)에게 견주기도 하였다.”

위는 ‘철종실록’ 8권, 7년(1856) 10월 10일 기록입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년) 선생은 이렇게 죽음에 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오를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중국 북송 때 최고의 시인이었던 소동파와 견줬을 정도로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났고 금석문에도 대단한 경지에 오른 사람이었지요. 그런 선생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던 초의선사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제문을 썼습니다.

“함풍 8년(1856) 무오 2월 청명일에 방외(方外, 속세 밖 곧 불가)의 벗 초의가 술 한 잔 올리며 김공 완당(추사의 또 다른 호) 영전에 고합니다.(중간 줄임) 선생의 학문은 하늘과 인간의 도리를 연구하여 백가(중국사상의 뿌리 제자백가)의 꽃다운 윤기를 머금었고, 필법은 천지조화에 참여하여 왕희지왕현지 필법을 능가했으며, 시문에 뛰어나 세월의 영화를 휩쓸고, 금석(金石)에서는 작은 것과 큰 것을 모두 규명하여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치셨나이다.”

정말 선생은 중국 최고의 서예가로 추앙받는 왕희지와 견줄 정도로 독창적이고도 예술적인 필체를 뽐냈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그런 뛰어남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열 개의 벼루를 닳게 하고, 천 자루의 붓을 쓴 다음에야 이루어진 것이었지요. 더구나 선생의 학구열은 뜨거운 한 여름 북한산에 올라 북한산순수비를 탁본할 정도로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지금도 많은 사람이 흠모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김영조 푸른솔 겨레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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