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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하선] 4·19혁명과 3·8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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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4.04.17 19:12
  • 기자명 By. 안순택 기자

세상일에는 대개 징후(徵候)란 게 있어서 큰일이 벌어지려면 그 징조(徵兆)로서 작은 사건 여럿이 쌓이고 쌓여서 터지게 되는 것이다. 4·19혁명의 직접적 발단은 3·15 부정선거와 마산의거지만, 그에 앞서 징조로서 2·26, 3·8 의거와 같은 사건들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다. 3·8 의거는 대전고 학생들이 “학원의 자유”를 외치며 일어선 사건이고, 이틀 뒤 10일엔 대전상고, 지금의 우송고 학생들이 나섰다. 혁명으로 이어진 선구적 학생운동이 충청 땅, 대전에서 일어났던 거다.

▷1960년 3월 8일은 민주당 부통령 장면 후보의 유세가 한밭공설운동장에서 있던 날이었다. 이날 의거는 원래 대전고를 비롯해 대전상고, 공고, 보문고, 사범학교, 대전여고, 서대전여고, 호수돈여고 등이 함께 벌이기로 돼있었다. 그러나 YMCA회관 회동이 무산되는 바람에 대전고의 단독 시위가 됐다. 시위에 앞서 외부세력의 학원침투 반대, 교내에서 선거운동 반대, 서울신문 강제구독 사절, 언론탄압 반대 등 결의문을 발표했고 시위의 물결은 공설운동장을 향했다.

▷시위대는 대흥동 로터리에서 저지하는 경찰과 맞서게 된다. 거리에 깔린 돌을 주워 투석전을 벌였지만 결국 총 개머리판으로 얻어맞고, 목덜미를 잡혀 연행 당한 학생들이 부지기수였다. 이틀 뒤인 10일엔 대전상고 학생들이 일어섰다. 이날은 자유당 부통령 이기붕 후보의 유세가 있던 날이었다. 기세등등, 신안동 굴다리와 원동네거리를 돌파한 시위대는 대전우체국 앞에서 경찰과 맞선다. 저지하는 경찰에 돌을 던지며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날 80여명이 연행됐다.

▷3·8의거는 아는 사람만 아는 의거로 기억에서 사라질 뻔했지만 작년에 새누리당 이명수 의원이 3·8의거 기념사업법 개정안을 제출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함으로써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를 53년 만에 찾게 됐다. 3·8의거는 그날의 사건도 사건이지만 정신으로 더욱 기억돼야 한다. 부정과 부패, 불의와 불법에 대한 항거, 억압과 비민주에 대한 저항 정신, 한마디로 깨어있는 시민정신이다. 4·19혁명 54주년을 앞두고 그때 충청 청년들의 올곧은 정신과 기개를 돌아봤다.

안순택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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