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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오곡밥과 묵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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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3.03 16:16
  • 기자명 By. 충청신문

정월 대보름은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부럼을 깨고 연날리기를 하면서 실을 끊어 날려 보내는 건 물론 쥐불놀이 하는 풍습도 있으나 열나흘 저녁에 먹는 오곡밥과 묵나물이 가장 일반적이다. 대보름을 전후할 때는 일 년 농사를 준비하게 되고 그에 대한 보양식으로 등장했던 건 사실이나 특별히 오곡밥과 묵나물을 먹는 이유가 없지는 않았다.

대보름은 설을 쇤 후 2주가 지나는 시기다. 설을 맞아 세배를 드리고 윷놀이와 제기차기를 즐기다 보면 어언 보름이 가까워진다. 한동안 잘 쉬었으니 농사의 첫 단계로 파종할 씨앗을 선별하게 된다. 추수가 끝난 뒤 보관 중인 곡식 중에서 잘 여물고 싹이 잘 틀만한 씨앗을 고르고 나면 조금씩 남게 되고 바로 이 곡식들을 모아서 이른바 오곡밥을 지었다.

오곡이란 예로부터 경작되었던 쌀 보리 조 콩 기장 등을 말하지만 그냥 쉽게 모든 곡식을 통틀어 일컫는다. 이를테면 정월 보름에 농사준비를 하면서 특별히 먹은 것인데 소화가 잘 되고 건강에도 좋다는 것이 알려지다 보니 지금은 여느 때도 계속 지어먹게 되었다.

오곡밥과 더불어 묵나물을 해 먹은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 때는 해동이 될 즈음이라 봄기운이 완연해진다. 날씨가 풀려 냉이와 씀바귀 등 봄나물이 나오는 판에 누가 묵은 나물을 먹겠는가. 겨우내 먹기 위해서 말려 두었던 묵은 나물을 더는 보관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대보름날을 기해서 묵은 곡식과 나물을 정리하여 먹어 온 오곡밥과 나물이 특별 건강식으로 전래되었다.

한낱 세시풍속으로만 볼 수도 없는 게, 그 즈음에는 본격적인 농사철이 도래하고 고된 농사일 때문에도 몸을 보양할 필요가 있었다. 겨우내 묵은 것만 먹던 식습관 대신 풋나물로 반찬을 해 먹기 위해 묵은 곡식과 나물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나왔으니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있는 특별한 음식이다.

비슷한 맥락이라면 자투리 천으로 만든 색동저고리다. 보름날 음식인 오곡밥과 나물이 자투리 곡식과 나물을 모아 만든 별식이듯 남은 천을 잇대서 만든 저고리다. 물자도 귀했지만 천 조각을 붙여서 만든 밥상덮개와 보자기도 있었던 걸 보면 파격적인 바느질을 고안해 온 옛날 어머니들이 유희가 아닐까. 재봉틀 하나 없이 손바느질로 밤을 새워야 했으니 지루한 것 때문에도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다.

천 조각을 활용하는 건 색동저고리와 비슷하되 잘 어울리는 색깔을 덧대는 바이어스 효과가 더 크다. 통짜가 아니어서 조각조각 잇대려니 까다롭고 복잡해질 수밖에 없으나 그럴수록 예쁘게 만들어진다. 회장저고리는 즉 여자 한복에 장식성을 더해 주는 것으로 서민들은 감히 입지도 못한 걸 보면 꽤나 고급 옷에 속했다.

조각보와 밥상 덮개 역시 전체를 잇대 붙이거나 테두리만 여러 가지 색으로 장식하게 된다. 자투리일망정 똑같이 마름질한 저고리와는 달리 가지각색 모양이지만 그런 대로 괜찮다. 살다 보면 불행의 옷감을 짤 수밖에 없고 그걸 마름질하는 격이나 깃과 끝동 고름에 회장을 다는 것처럼 색다른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

인생도 마름질하다 보면 자투리가 나온다. 미완성으로 끝난 이상과 꿈은 더더욱 집착하게 되고 필경은 아까운 경우가 다반사라 보자기를 만들고 저고리를 짓는 것처럼 잇대는 방법을 강구해봄직 하지 않을까. 자장구가 나지 않은 천에 깃과 끝동을 단 회장저고리는 격조가 있지만 미완의 소망을 틈틈 모아 연출하는 색동저고리 같은 이미지도 괜찮다. 옷감이 넉넉할 때는 매사 잘 될수록 삼가는 차원에서 남은 천으로 끝동을 덧대며 자중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이제 곧 오곡밥과 묵나물을 먹게 될 것이다. 잡곡과 나물 등은 벌써 조목조목 준비해 두었다. 해마다 맞는 명절이지만 그럴 때마다 이루지 못한 꿈과 소망도 소중히 여기고 간수하라는 메시지를 새겨두곤 한다. 그 옛날 농사꾼처럼 파종할 씨앗을 선별하고 남은 게 아닌 장에서 사 온 터고, 단지 남은 곡식과 나물을 뒤섞는 거지만 하찮은 삶의 조각도 잇대는 방법에 따라 훌륭한 작품이 될 것을 구도하는 셈이다.

 

 

이정희 시인·둥그레 시 동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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