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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이듬나라 행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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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12.01 18:32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이 정 희 시인. 둥그레동인회장

초겨울에 웬 꽃인가 했다. 낙엽은 지고 가랑비까지 날리는데 외딴 집 돌무더기에 민들레가 피었다. 남들 다 진 뒤에 후렴으로 피는 꽃은 흔해도 이렇게 겨울의 초입인 줄은 몰랐다. 과꽃 등의 가을화초가 뒤늦게 피는 거라면 또 모르되 봄꽃이었던 민들레가 피는 건 사뭇 생소하다.

언젠가는 또 망초대를 보았다. 김장을 끝내고 메주를 쑤고도 한참 지난 어느 날 오솔길을 지날 때였다. 곧 바로 추워지는 통에 참혹하게 져 버렸으나 가끔 그런 꽃을 보면서 강인한 생명력을 배운다. 겨울이라 해도 양지쪽에서 이듬으로 피는 것처럼 살 동안도 보면 이듬 또는 후렴으로 피는 자리가 있다. 하얀 꽃잎에 찍힌 보랏빛 반점은 추워서 질린 것 같았으나 그런 게 삶이 아니었을까.

저녁에는 호박 수내기 국으로 포식을 했다. 보름 전 서리거둠으로 따 온 것을 오늘 마지막 끓여 먹었다. 무서리에 잎은 다 죽고 덩굴은 형편없이 망가졌어도 따스해지면서 수내기가 뻗어나갔다. 거의 매일 된장국을 끓였다.작두콩만한 호박이 달리고 꽃송이까지 달린 것을 박박 씻어 콩가루에 묻혀 넣었다. 구수한 맛이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아 하나도 버릴 게 없었다.

가랑비가 뿌렸었지. 찬바람이 짓대고 간 텃밭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미처 뽑아 들이지 못한 서리태는 쓰러져 있고 구석으로 호박덩굴 수내기가 파랗다. 그렇게 따 온 호박 수내기국은 이후로도 오랜 날 상에 올랐고 입맛을 돋워 주었다. 늦가을비가 오늘따라 시원한 것도 한참 내리다가 그친 웃비의 서슬 때문이었던 것처럼.

상추 또한 독특한 맛이었다. 앙상한 대궁에서 애기 손바닥만하게 나온 수내기를 잘라 겉절이를 무치면 깔끔한 맛이다. 지독히도 쓴 맛이었던 게 물 내리는 철에 수분이 적어지고 순해지면서 겉절이를 할 때마다 독특한 맛을 연출했다. 어디 그뿐인가. 가을 아욱도 11월이면 대궁이 앙상해지고 조금씩 너울해진 것을 잘라 된장국을 끓이면 그 또한 별미다.

밭둑에만 가도 파랗게 올라온 냉이를 볼 수 있다. 콩이며 깨를 다 거둔 들판은 텅 비어 있지만 그런 속에서도 쬐끔씩 올라오는 냉이며 아욱 등의 푸성귀가 쏠쏠한 먹거리로 등장한다. 그게 곧 이듬으로 맛보는 풍미였을까. 상추로는 겉절이를 하고 국 또한 이듬이라 할 호박순과 아욱으로 끓인 셈인데 늦가을 이미지 또한 그랬다. 들판은 텅 빈 채 단풍이 지고 눈까지 내렸으나 이따금 남아 있는 이삭은 가끔 그렇게 풍성했다.

생각하니 우리 집 텃밭도 그랬다. 밭이라고 할 것도 아닌 양쪽 건물 사이에 낀 볼기짝만한 땅이었으나 조금씩 심어 먹는 재미가 곧 조금씩 얻어지는 자투리 삶의 면모 그대로다. 여름에는 흔했던 것이 겨울에 접어들면서 더더욱 빈약했지만 가뜩이나 열악한 밭 모퉁이에서 적게 거두는 이듬 먹거리로 포식을 하듯 행복도 불행의 밭에 이듬 나고 자란다.

상추나 아욱처럼 불행의 가지는 다 떨어져 나가고 밋밋한 대궁에 늦가을도 썰렁할 때 달리는 수내기 같은 행복을 잡고 싶다. 숱한 불행 속에 아주 조금 깃드는 행복에 주목해야겠다. 빈약한 민들레와 달맞이꽃이 잘 가꿔 놓은 정원에서 피었다면 양상은 달라질 테니까. 실제 어디 정식 화초였던가. 꽃이 피기 전에는 잡초에 불과했다는 게 더욱 경이로웠다.

꽃밭의 잡초는 거슬리되 잡초 속의 꽃은 시적이기까지 했다. 빈약하고 볼품은 없을지언정 꽃이 흔할 때의 느낌보다는 강렬했다. 아무리 잘 가꿔도 꽃밭의 잡초는 제거하기 어려우나 잡초투성이 밭에서 보는 꽃은 누가 봐도 경이롭다. 살면서 이따금 깃드는 행복도 잡초 속의 꽃처럼 남다르다. 불행이라고 기피할 건 아니었으니까.

입맛이 까다로운 우리 식구가 포식을 했던 호박수내기가 다시금 떠오른다. 얼추 다 먹었지만 짝짝 바라진 봄똥 배추가 또 있다. 이것만 가지면 섣달까지는 넉넉할 테고 초봄이 되면 지난 해 미처 도리지 못한 쪽파와 시금치에서 조목조목 다시 돋을 테니 걱정은 없다. 뿌리와 대궁이 있는 한 또 나온다면 충분히 행복하다. 호박 수내기 국 또한 메뉴랄 것도 영양가도 없지만 늦가을의 영양식이 되듯 소량의 것들이 때로 특별한 의미를 준다.

늦가을 꽃과 채소가 더러는 기쁨을 주고 풍성한 식단을 만드는 것처럼 내세울 것 없는 이듬나라의 행복은 나름 소중했다. 우리 집 텃밭도 옹색하다고만 해서는 늦가을의 풍요는 가당치 않다. 작은 데서 느끼는 행복인 만큼 순수한 마음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행복은 이듬나라 중에서도 모퉁이를 비집고 나오는 소망이었다.

애당초 많지 않고 늦사리 작물이라 빈약할지언정 분복에 맞으면 행복이다. 내 삶의 터전 역시 작은 텃밭이었다. 소출은 비할 수 없이 적으나 치수를 줄이고 이듬으로 나오는 것에 만족하면 그 또한 행복이다. 잡초 속의 꽃과 늦가을 푸성귀 같은 이듬 나라 행복은 쉽게 누릴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뭐 그까짓 것 할지 모르나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기가 어렵다면 조촐한 나의 행복도 누군가에게는 꽤나 약 오르는 일이 될 테니까.

이 정 희 시인. 둥그레동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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