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세상사는 이야기] 겨울 나그네처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입력 : 2016.01.19 16:31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이 정 희 시인. 둥그레동인회장

겨울 호수에 눈이 내렸다. 도요새 살던 덤불숲이 산새알처럼 솟아올랐다. 보푸라기 날리는 억새밭도 둥둥 새하얀 섬으로 떠오른다. 골골마다 설경은 그린 듯 아름답고 하얗게 뒤덮인 원시림 앞에 서 있으니 발걸음도 깃털마냥 가볍다.

아무도 없는 골짜기에 첫발을 내딛으면서 천고의 신비를 들춰 보는 이 기분! 하필이면 인적마저 드문 오후, 이제 막 태어난 눈밭에 길을 여는 것이다. 이 세상 오로지 혼자 가는 것 같은 착각이야말로 눈 쌓인 겨울 호수에서 맛보는 최고 환타지다. 계절의 배후에 남아 있던 겨울처럼 나 역시 눈이 내릴 때마다 겨울 나그네를 자처해 왔다.

호수에는 나와 엇비슷한 부류가 많았다. 우선 눈에 띄는 건 따스한 곳을 찾아 날아 온 청둥오리다. 혹독하게 바람 부는 날 가 보면 떼로 모여 자맥질이다. 물속을 버르집고 허공을 박차 오르면서 겨울을 물어 뱉는다. 그러다가 얼마 후 봄이면 약속이나 한 듯 떠나가게 될 수많은 철새….

그들의 거주지인 모퉁이 작은 섬도 겨울 한 철 보이는 나그네다. 자맥질을 하던 새들이 어느 순간 기슭에서 쉬는 걸 보면 아지트가 분명했지만 여느 때는 눈에 띄지 않던 섬이다. 물이 많을 때는 파묻혀 있다가 빠질 즈음에야 이루지 못한 꿈처럼 드러나는데 떠도는 철새가 떠돌이 같은 섬에 머물러 있다. 나 또한 그럴 때마다 한 사람 겨울 나그네로 정착하는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은 그래서 당연했다.

눈도 바람에 날려 이곳에까지 왔다. 석 달 열흘씩이나 두고 만들어진다니, 그렇다면 까마득히 먼 허공 어디쯤서 날아왔을 것이다. 기슭을 돌아가면 둠벙이 나오고 거기 물조차도 나그네 새 때문인지 자박자박 흐른다. 모퉁이만 돌아가도 사철 푸른 소나무가 흔했으나 물가에는 앙상한 포플러와 자작나무뿐이다. 둔덕의 나무도 이들 철새를 위해 벌거벗은 채 떨고 있다. 낙엽이 지면서 한 그루 나목이 된 것이라 하되 묵묵히 견디며 오히려 바람의 메시지를 받아 적었다. 그렇게 모두가 외로운 속에서 아무리 추워도 떨어질 잎 하나 없이 빈 가지로 연주하는 겨울 소나타다.

눈과 더불어 집시적 분위기로 바뀌는 풍경도 겨울 하모니의 백미다. 우리 나그네 삶을 동경하는 것도 가지 못한 길에의 설렘 때문일까. 지나온 길과 가야 될 길 앞에서 헤맨 적도 있으나,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할 때보다 갈 길이 많을 때가 더 행복하다. 나그네 하면 떠나는 게 연상되지만 봄도 겨울의 끝자락에서 손짓하듯 소망 때문에 힘든 여정을 답파할 수 있다.

십여 분쯤 갔을까, 문득 갈림길이 보였다. 눈 속에 파묻혀 있는 전설 같은 얘기가 들렸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무도 부르지 못한 노래고 처음 눈에 띈 별이 가장 빛나는 별이라고 했다. 모르기는 해도 저 눈 속에는 우리 듣도 보도 못한 뭔가가 잠재되지 않았을까. 내 발자국을 필두로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취가 나면서 칙칙한 땅이 드러날지언정 잠깐이나마 환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시간은 소중했다.

얼마 후, 눈보라가 틔워 낸 길은 끝나고 조붓한 산자락이 나온다. 비알을 헤쳐 가려니 엄두가 나지 않고 돌아서자니 온 길도 만만치 않다. 그렇게 한참 망설이다가 끝내는 되돌아오면서 본 게 하필 눈속에 파묻혀 있는 겨울내기 새싹이었다. 눈더미를 비집고 올라온 몇 모숨 냉이에서 겨울에도 푸른 소망을 본다. 별나게 아늑한 자리라서 잠시 싹을 틔운 것 뿐이고 금방 죽어버릴 테지만 꿈을 보는 듯 신선한 느낌이다. 어디로 가야 될지 망설일 동안의 경이로움이라 더욱 설렜다. 앞으로 가야 될지 온 길을 돌아가야 할지를 망설이면서 진정한 여행의 진수를 아는 것처럼 막연한 순간도 때로 돌파구가 된다.

가랑잎이 버석거린다. 봄내 가으내 초록과 단풍을 뽐내다가 한줌 뗏장으로 묻힌 건 착잡한 느낌이나 봄이면 다시 푸르러진다. 우리도 한번 가면 올 수 없는 삶이었기에 더 큰 의미를 남기려 했다. 눈 쌓인 세상을 들어 올리면 꿈나라가 따로 없을 것 같은 신비도 필경은 사라진다. 모든 환상은 신기루이듯 우리 삶도 그렇게 마감되겠지만 길은 끝나면서 시작되고 그 위로 푸른 하늘이 펼쳐진다. 겨울호수와 찬바람에 떨고 있는 나무도 경건히 생각하는 모습이다. 지난 가을 떨어진 씨앗도 눈을 뒤집어 쓴 채 하루하루 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답답할지언정 그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망울을 새길 수 있기에 묵묵히 기다린다.

겨울하늘을 날아갈 수 있어야 진정한 새다. 겨울이 없으면 봄은 절박하지 않듯이 시련이 아니면 영광의 삶은 누리지 못했다. 고달픈 날들에서도 내일을 꿈꿀 동안은 행복하다는 것을 겨울호수에서 새삼 보고 느낀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던 걸까. 들판은 텅 비고 산이 온통 흰 눈에 덮여도 봄을 위해 기다리듯 내일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는 사람이고 싶다. 겨울나무조차 잿빛 하늘 밑에서 초록을 준비한다. 차가운 눈 속 어디선가 봄을 아로새기는 꽃씨마냥 오래 참고 기다리는 삶을, 봄 때문에 침묵하는 계절의 간이역에서 배운다. 눈물로 노래하는 겨울 나그네처럼….

이 정 희 시인. 둥그레동인회장 

저작권자 © 충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충청신문기사 더보기

하단영역

매체정보

  • 대전광역시 중구 동서대로 1337(용두동, 서현빌딩 7층)
  • 대표전화 : 042) 252-0100
  • 팩스 : 042) 533-7473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황천규
  • 법인명 : 충청신문
  • 제호 : 충청신문
  • 등록번호 : 대전 가 00006
  • 등록일 : 2005-08-23
  • 발행·편집인 : 이경주
  • 사장 : 김충헌
  • 「열린보도원칙」충청신문은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 노경래 (042-255-2580 / nogol69@dailycc.net)
  • Copyright © 2024 충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ilycc@dailycc.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