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 사실이 밝혀진 구한말 항일 의병장은 강원도 고성군 서면 송탄리 출신의 권형원(權亨源·1854∼1907) 이다.
이 같은 사실은 독립기념관의 제324회 월례연구발표회에서 논문 발표예정의 보도자료를 통해 드러났다.
독립기념관은 28일 오후 2시 밝은누리관 1층 강의실에서 ‘高城 의병장 권형원의 의병투쟁과 斷頭 ‘釜煎’ 수난‘이란 제하의 연구발표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휴전선 북방, 현재 고성군 순학리 금강산 진입로 부근에서 성장한 권형원은 1896년 민용호가 이끌던 강릉의병 예하의 고성 유진장(留陣將)으로 활약했다.
향반 출신이던 그는 당시 동해 연안 어장을 침탈하던 일본인 어부들을 잡아 처단했을 뿐 아니라, 일본 상인들의 상권 침탈행위를 단죄하는 등 고성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1907년 광무황제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됐다.
분연히 일어선 53세의 권형원은 고성, 간성, 양양, 강릉 일원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수개월간 10여 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그가 치른 최후의 항전은 1907년 10월 20일 고성전투였다.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소장자료인 당시 한국주차군 참모장이 육군 차관에게 보고한 문건에 따르면, 이날 새벽 권형원이 지휘한 의병 350명이 고성읍을 습격, 5시간 동안 머물며 일본군 분견대(보병51연대 9중대 소속)에 치명적 타격을 가한 뒤 철수했다.
앙갚음에 나선 일본군은 의병활동을 지원하던 인근 마을을 돌며 지도자 12명을 끌어다 총살시켰다.
송탄리 자택에 은신해있던 권형원도 체포돼 고성읍을 가로 지르는 남강(南江)의 소나무숲으로 끌려가 사살됐고 집은 불태워졌다.
그의 시신은 이후 더 참혹하게 다뤄졌다.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일본군은 권형원의 목을 잘라 수비대 본부가 있던 고성 북쪽 장전항으로 가져가 가마솥에 넣고 삶는 끔찍한 만행을 자행한 것.
처참하게 수난을 당한 권형원의 두골은 그 뒤 30여 년이 지나 일본에서 발견된다.
일본군이 두골을 강제 반출했던 것으로 1930년대 권형원의 친척이 수학여행중 모 신사(神社)에 비치된 ‘강원도(江原道) 권형원(權亨源)’ 표식이 있는 두골을 목격하고 유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전해줘 알려지게 됐다.
한편, 1977에는 ‘의병대장권하경총살입증서(義兵大將權夏卿銃殺立證書, 1977.4.16)’ 등이 정리돼 수난 사실을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전해준다.
이 같은 증언과 자료를 인정받아 순국 사실이 인정돼 권형원은 1990년 애국장에 추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