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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가을 냉이국

이정희 시인.둥그레동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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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6.11.01 16:16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이 정 희 시인.둥그레동인회장
[충청신문=이정희 시인.둥그레동인회장] 모처럼 먹은 냉이국은 향기가 독특했다. 된장을 넣은 것뿐인데도 삼삼하니 구수하다. 벌써 몇 해 째 가을이면 즐겨 먹는 메뉴다. 언젠가 초겨울 밭둑에 퍼진 냉이를 캐 온 뒤부터 재미를 들였다. 냉이뿐 아니라 질경이와 망초대까지 흔하다. 나물이라면 봄에만 먹는 줄 생각했다가 우연히 맛을 알았다.
 
올 봄에는 냉이가 흔치 않았다. 이른 봄 야산이나 밭둑에 보면 무성하게 올라오곤 했는데 별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가을에 그리 흔해졌을까. 개울 둑에만 가도 씨를 들이부은 듯 바글바글했다. 찻길이라 뜯어먹지는 못하지만 길 가에 그 정도니 밭둑에는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봄 냉이처럼 향긋한 맛은 없어도 오늘처럼 탑탑하니 구수하면 충분히 먹을만하다.
 
어느 해는 가을 쑥이 잔뜩 우거져 있다. 필연 봄에 쑥이 귀했던 것 같다. 봄 가을 모두 흔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그런 식이다. 봄 쑥만은 못해도 국을 끓이면 부드럽고 맛이 괜찮다. 어쩌다 봄에 뜯지 못할 경우 가을에는 더 흔하고 넉넉할 것을 생각하면서 힘을 얻는다. 시기를 놓쳤다고 동동거릴 게 아니라 후일을 미루어 생각하면서 아쉬움을 달래는 것이다.
 
가을은 봄의 재현부다. 나물은 말할 것도 없고 장미와 개나리와 민들레 등도 다시금 핀다. 꽃은 이상 기온으로 그렇다지만 냉이와 쑥 등은 해마다 움을 틔웠다. 특별히 봄에 흔치 않았던 것이 더 많이 돋아나는 건 1악장과 2악장이 비슷한 소나타 형식 그대로다. 밝고 명쾌한 1악장 뒤에는 차분한 2악장, 그 다음 3악장에서는 1악장처럼 특유의 명랑한 멜로디가 이어지면서 끝난다. 2악장의 차분하고 잔잔한 분위기도 좋지만 1악장의 리듬과 선율이 마지막에서 반복되는 게 특이하다. 바로 그  3악장이라 할 가을이면 봄에 먹은 나물을 다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생도 1악장에서는 명쾌하게 나간다. 넘치는 의욕과 재기발랄한 젊음을 나타낸다. 그렇게 무엇이든 할 것 같은 가능성의 세계가 돌연 주춤하면서 2악장의 차분하고 안정된 느낌이다가 3악장에서 비약이나 하듯 바뀐다. 특별히 난롯가에서 불을 쬐듯 혹은 고구마며 밤 등속을 구워 먹는 무료함을 깨기나 하듯 돌변하던 3악장 특유의 뉘앙스가 1악장과 어지간했다.
 
거둘 때만 기다리는 들판을 봐도 충분히 배부른데 불쑥 초록 일변도로 바뀐 배경도 마찬가지다. 다 거두고 나면 쓸쓸해질 것 때문에 난데없는 초록을 준비했다는 느낌. 봄에 귀했던 것이 가을에 많이 나오는 건 또 그렇다 쳐도 결실 다음에 있을 허전함 때문이라는 건 스스로도 예기치 못했고 그만치 참신한 느낌이었다. 다른 곳에도 바글바글했지만 냉이를 캐 온 논둑이 온통 황금물결이었던 것이다.
 
한 필지 두 필지 거둬들이기 시작한 게 열흘 남짓인데 거지반 끝났다. 이대로 가면 사나흘 안에 들판이 텅 비고 곡간은 채워지겠지만 가득 차 있고 풍성했던 만치 약간은 쓸쓸해지겠지. 그래 미리감치 초록을 준비해서 쑥이며 냉이와 민들레가 그리 지천으로 나왔으리라는 생각. 수확이라야 봄내 여름 내 자라고 익은 것을 거두면 되지만 한편에서는 물이 내려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면서 조락의 계절이 된다. 새파란 쑥과 냉이와 질경이와 민들레까지 번지게 하면서 스스로 조락의 계절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는 걸까.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에서 겨울을 제외하고 구성해 본 3악장이었으나 준비가 필요하다면 겨울도 과정이다. 우리 보는 교향곡도 길어야 2시간이지만 겨울 한 철 뿐이 아닌 오랜 연습 끝에 감동을 자아낸다. 살 동안 침체기가 있을지언정 춥고 지루한 겨울 끝에 찾아온 봄을 생각해야겠다. 더욱 그로써 시작된 마중물에 초목이 자라고 천둥과 비바람 끝에 가을의 황금들녘을 일군 것처럼.
 
우리도 그런 식으로 리듬을 타게 된다. 안락의 휴식은 2악장에서 끝나야 맞다. 혹 마지막 악장까지 이어진다면 나태와 안이의 늪에 빠지고 만다. 세 악장 중 하나만 빼고 나머지는 들쭉날쭉 예기치 못한 일들과 변화의 연속이다. 풍요로운 수확 끝에 무기력해질까 봐 초록을 깔아놓으면서 분위기를 바꾸는 거라면 우리 삶의 원고지도 그렇게 채울 수 있다. 봄에 흔치 않아서 뒤늦게 무성해지기도 하지만 낱낱 거둔 뒤의 쓸쓸해질 들판을 겨냥해서 그리 나온다는 소망을 접목하는 셈이다. 3악장도 후반인 조락의 벽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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