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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09.07.26 19:52
- 기자명 By. 뉴스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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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골 간판이 보이는 지점에서 주유소를 끼고 우회전하면 화성면 게이트볼 장이 있다.
그 곳에 차를 주차한 후 다락골 성지로 걷는 3k의 정도의 인적이 드문 시골 길이다.
주변의 소요가 없는 이런 조용한 길을 걷는 것은 본연의 자신 모습을 되찾는 길이 될 수 있기에 한 시간이 채 안 걸리는 길이지만 세상을 벗어난 듯한 새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줄무덤 성지를 가기 전 옆 농로 를 따라 들어가면 최경환 성인의 생가가 있다.
이곳은 최인주가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지어 정착한 마을로 결혼해 6남매 를 두었는데 막내 아들이 1984년 5월 6일 시성된 최경환 이며, 최경환 성인의 장남이 최양업 신부다.
최경환 성인은 수계 생활이 어렵게 되자 주교, 신부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최양업이 12세 때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다.
최양업 신부는 1836년에는 신학생으로 마카오로 떠나고 수학을 한 후 조선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사제가 된 사람이다.
그의 생애는 오랫동안 김대건 신부의 활약과 순교에 묻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앙을 증거 한 관점에서 볼 때 김대건 신부의 순교는 전형적인 피의 증거이고, 최양업 신부의 사목 활동은 모범적인 땀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곳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1791년이다.
신해박해의 모진 서슬에 최양업 신부의 조부 최인주가 그의 어머니, 곧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누이를 모시고 피난해 들어오면서 교우촌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곳에서 2k정도 걸어가면 줄무덤 성지가 나온다.
이곳은 성역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방윤석 베르나르도 신부에 의해 이 마을의 구전과 사료를 수집하여 현지답사를 계속한 끝에 1981년에 줄 무덤이 한 군데가 아니고 세 군데임을 밝혀냈으며, 편의상 제 1, 2, 3 줄 무덤으로 구분 하였다고 한다.
줄 무덤은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인데 1866년 병인박해 때 홍주 감영에서 순교한 시신을 몰래 이곳에 옮기어 안장 했다는 말이 유력히 전해지는 곳이다.
따라서 이 무덤들의 임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무명은 침묵과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숭고함이 있기에 더욱 경건함이 드는 곳이 이 산골 성지이다.
농암리 다락골 은 순수 우리말로 ‘달안골’이라 한 것이 다락골로 바뀌어 전해졌다고 한다.
달을 안고 있는 형상이라는 다락골 이라는 지명처럼 둥근달이 더욱 크게 보이는 아름답고 운치 있는 성지이다.
강명수/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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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자 기자
dailycc@dailycc.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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