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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세평] 녹음의 시대

우종현 법률사무소 정음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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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7.01.18 16:27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우종현 법률사무소 정음 대표변호사
[충청신문=우종현 법률사무소 정음 대표변호사] 회사 신입사원 시절. 처음으로 부장님이 주재하는 회의에 들어갔다가 크게 당황한 적이 있다. 부장님은 모든 문장마다 ‘거시기’라는 대명사를 넣어 말씀하시는 분이었다. ‘거시기’로 시작해서 ‘거시기’로 끝나는 말을 하셨는데, 가장 충격적인 말은 “거시기를 저기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거시기’가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르겠고, ‘저기 해야 한다’는데 뭘 하라는 말인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신입사원 처지인지라 감히 부장님께 ‘거시기’의 의미를 묻지도 못하고, 그저 부장님 말씀을 노트에 꼼꼼히 받아 적기는 했는데 회의가 끝나고 다시 읽어보아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정호성 전 청와대 비서관의 심정을 이해한다. 검찰은 정씨의 휴대폰에서 박근혜 대통령과의 통화내용, 최순실 씨와의 통화내용을 녹음한 파일을 발견해서 최씨의 국정개입 혐의를 수사 중이라고 발표했다. 
 
녹음파일만 무려 236개. 한 신문 보도에 따르면, 정씨는 검찰에서 최씨와의 통화 내용을 녹음한 이유에 대해 “최씨가 말을 두서없이 해서 무슨 말인지 파악이 어려워 녹음을 했다”는 진술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은 그 간에 공개된 녹음 파일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최씨가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이렇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사회에서 그렇게 불공정한 사태가 나고 이렇게 그, 저기, 난맥상을 나오고, 그 저기.” 정씨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정씨는 녹음 파일을 다시 들어보고 최씨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바야흐로 녹음의 시대이다. 멀리 청와대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스마트폰이 도입되면서 당사자 간의 통화 내용을 녹음하는 일은 이제 일상다반사다. 운전 중에 통화를 하거나 메모지가 없는 상황에서 상대방이 말하는 계좌번호나 전화번호를 기억해야 할 때 통화 내용 녹음은 매우 유용하다. 
 
또 우리는 믿을 수 없는 상대방과 계약을 한다거나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때,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분쟁에 대비해서 통화 내용을 녹음하기도 한다. 민사소송의 경우, 계약서가 없어서 상대방이 계약이 없었다고 발뺌하거나 계약서가 있더라도 그 의미가 불분명해서 당사자 간에 이견이 있을 때 상대방과의 통화 내용을 몰래 녹음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을 녹취록으로 제출하는 경우가 많다. 몇몇의 사건에서는 녹음 파일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당사자 사이의 대화를 녹음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어서, 나도 의뢰인들에게 소송 상대방이나 이해관계인들과의 통화 내용을 녹음할 것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통화 내용을 자동으로 녹음하고 녹음 파일을 이메일로 전송하는 어플리케이션까지 개발돼서 통화 내용 녹음하는 일이 정말 손쉬워졌다. 
 
의뢰인들이 가져오는 녹음 파일을 듣고 있다 보면, 서글픈 생각이 든다. 녹음 파일의 대부분은 서로 언성을 높이면서 다투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한 때 죽도록 사랑했던 연인들이 죽도록 싸우고, 수십 년 한솥밥을 먹고 살았던 형제자매들도 싸운다. 의뢰인 중에 세상 누구보다도 점잖은 노인분이 있었는데, 녹음 파일을 듣다 그 분이 입에 담기 무서운 육두문자를 쏟아내는 것을 듣고 놀란 적도 있었다. 녹음 파일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을 퍼부어 대고 있을 뿐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는다. 시종일관 사람들이 악다구니를 쓰는 것을 듣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어서, 나는 가급적 녹음 파일 청취는 업무 중 가장 마지막으로 미뤄둔다. 
 
비단 소송의 경우뿐만이 아닐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녹음을 해서 남기려고 하는 것들은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말이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름다운 대화가 아니다. 우리가 녹음을 하는 이유는 대부분 상대방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대화를 보전하기 위해 애써 녹음 버튼을 누른다. 
 
녹음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 사이에 의심이 만연해지고, 나는 오늘도 밥벌이를 위해 의뢰인들에게 통화 내용을 녹음하도록 권유함으로써 만인의 만인에 대한 불신 사회를 이룩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내가 이러려고 변호사가 됐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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