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의 아버지는 홍성경찰서 경찰관이었으며 지난 1950년 7월 북한의 남하로 홍성경찰이 후퇴를 결정하자 아버지를 따라 임신 중인 어머니와 함께 충남 서천 장항까지 피난을 갔으나 갑자기 아버지의 소식이 끊겨 어머니와 함께 홍성 구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됐다.
이후 경찰서에서 아버지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당시 10살이었던 A씨는 동생을 임신한 어머니와 함께 생계를 꾸려가느라 아버지의 유해를 찾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이에 성인이 된 후 아버지의 유해를 찾기 위해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에 찾아가보고 ‘전사자 유가족 DNA시료 채취’도 했으나 아버지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으며 80세가 되기까지 해마다 국립묘지의 비어있는 아버지 묘소에서 그리움을 달래던 중 ‘혹시 홍성경찰서 경찰관이었던 아버지의 기록이 홍성경찰서에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홍성서로 전화를 하게 됐다.
이같이 홍성서 경무계 직원들은 서고에 보관돼 있던 ‘순직경찰관대장’에서 A씨 아버지의 이름을 확인했으나 ‘전북 이리(지금의 익산)에서 전사’라는 기록만 남아있을 뿐 전투지역과 사망 장소는 적혀있지 않았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직원들은 ‘호국충남경찰사’를 찾아 그곳에서 전투 장소 등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당시(1950년) 후퇴한 홍성경찰은 7월 19일 밤 11시부터 북한군 1000명과 조우했으며 우세한 적의 화력이 집중되는 가운데 충남경찰대원들은 5시간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며 적 30명을 사살하였으나 북한군 기계화 부대가 투입돼 특경대를 포위하려 하자 적진으로 돌격을 감행, 혈전 6시간 만인 7월 20일 오전 5시 충남경찰 59명의 대원은 황등 산야를 피로 물들이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익산 다송초등학교 부근 황등전투)
이와 관련해 홍성경찰은 익산경찰서 경우회장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도움을 요청했고 ‘당시 전투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을 소개해줄 테니 언제든 연락을 달라’는 답변을 받아 경찰은 A씨에게 관련 내용과 경우회장 연락처를 전달해 수도권에 거주 중인 A씨는 지난달 5일 익산으로 찾아가 당시 경찰관들의 유해를 수습했던 주민을 만나 부친이 전사한 장소와 유해가 묻힌 장소를 들었고 부친께 술 한 잔 올리는 등 죽기 전 소원을 풀었다.
또한 감사인사를 전하기 위해 홍성경찰서에 찾아오겠다는 A씨에게 김희환 홍성서 경무계장은 “경찰관으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이라며 정중히 사양했다.
한편 김계장은 “1950년 6·25 전쟁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희생한 홍성경찰서 선배님과 그분의 아드님이 70년 만에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경찰관으로써 기쁘고 보람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