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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내 고장 칠월은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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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0.07.07 15:18
  • 기자명 By. 충청신문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베란다 창 너머 온통 초록 풍경이다. 어느 농부의 밭고랑엔 봄기운이 완연할 때 뿌렸던 씨앗들이 연둣빛 싹을 틔우는가 싶더니 어느새 쑥쑥 자라 열매를 맺고 있다. 길가의 나무들도 한껏 물을 머금어 생기를 돋우고 들녘마다 먼 산의 온갖 자연들이 척박한 땅속에서도 분주히 움직이며 제자리를 찾은 듯 안정감 있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내 고향 시골에도 칠월이면 녹음이 절정에 달했다. 들로 산으로 온통 초록이었다. 더불어 마당에는 꽃보단 푸른 잎의 채소들로 풍성했다. 적당히 높은 흙담을 타고 초록의 오이와 호박이 넝쿨을 올렸고 그 아래로 구슬 같은 방울토마토가 붉게 익어갔다. 고추 몇 그루와 가지가 통통하게 살을 찌우며 제 색을 내기 시작하면 엄마는 반찬 걱정을 조금은 덜 수 있다며 매일 채소 반찬을 밥상 위에 올렸다.

특히 앞마당에는 초록 대문을 타고 오르는 포도 넝쿨이 가히 풍경이었다. 겨우내 사목처럼 잠들어있다가 삼월이면 눈을 뜨고 칠월에 이르면 풍성하게 줄기를 뻗었다. 수시로 사다리를 이용해 오르내리며 잎을 정리해준 아버지의 정성 덕분인지 포도 넝쿨은 해마다 넓고 시원한 그늘도 만들어 주었다. 송이송이 실한 열매를 매달고 영글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그 공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에게 자랑도 하셨다.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되는 이맘때면 엄마는 마당 평상에 자주 저녁상을 차렸다. 텃밭에서 갓 따온 옥수수를 찌고, 널찍한 판 위에 홍두깨를 이용해 직접 밀가루를 반죽해 국수도 밀었다. 담장에 매달려 있는 애호박을 채 쳐 방금 밀어낸 국수와 삶아 찬물에 헹궈내고 양념간장만 한 종지 놓으면 저녁 준비는 다 되었다. 조촐한 찬이었지만 가족들은 옹기종기 둘러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며 저녁 만찬을 즐겼다. 그렇게 여름 한 철 마당에 심어놓은 먹거리들이 더위 속에서 알차게 여물어가듯 자식들은 엄마의 단백하고 소박한 손맛에 더위를 잊곤 했다.

저녁상이 차려지는 동안 아버지는 어둑한 마당 중앙에 모깃불을 피웠다. 재료는 시골집 근처에서 흔하게 많이 자라는 온갖 쑥이었다. 가까운 상점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모기약이 있었지만, 가족들 인체에 해롭다는 이유를 들었다. 바짝 마른 잡풀들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금방 베어 온 쑥 더미를 올리곤 불을 지폈다. 한껏 물기를 머금은 초록빛 쑥은 어느새 싸한 회색 연기를 뿜어내며 마당을 자욱하게 휘감았다. 그리고는 독한 모기며 온갖 벌레들을 몰아내 주는 그야말로 친환경 여름 해충 퇴치제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조금은 맵기도 한 알싸한 쑥 향을 감싸 안은 회색빛 연기에 질끈 감은 눈을 뜨게 하는 데에는 엄마의 부지런한 부채질이 있었다. 모깃불이 점점 사그라들어 가벼운 재로 남을 때까지 우리 가족은 평상에 앉아 밤하늘의 별을 세며 깊어가는 여름날을 즐겼다. 나는 엄마의 무릎을 베고 세 살 아래 남동생은 아버지의 다리를 베개 삼아 나란히 누워 두 분의 부채질에 잠이 들었던 적도 여러 번이다. 은은한 달빛을 이불 삼아 눈을 감으면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두 분의 정담(情談)들이 자장가처럼 편안했다. 유년의 일상을 채워준 사소한 기억들이 네모난 보자기처럼 두고두고 내 삶을 감싸 안아준 참 좋은 기억의 시절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저마다 하루하루 답답한 긴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칠월의 여름은 점점 깊어지며 더위를 몰고 오는데 쉬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현실 앞에 사람들은 피로감을 호소한다.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학교에서 근무하다 보니 온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는 아이들도 안타깝다. 이럴 때일수록 제철에 나는 먹거리로 심신에 면역력을 단련시켜 주면 어떨까. 더불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 의미화한다면 그 시간만큼 추억은 덤으로 따라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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