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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역할어, 계급어

서필 목원대 교수·테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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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2.02.15 15:06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서필 목원대 교수·테너

코로나 19의 터널이 길다. 최근 오미크론 확산은 이젠 주위 누군가는 확진자일 만큼 흔하게 접하는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같은 반 친구의 확진으로 자가격리에 들어간 막내딸과 같이 며칠을 집밖에 못 나가고 이른바 ‘집콕’을 시전했다. 영화 몇 편을 보고, 번역하던 오페라 자막과 학교 공연에 쓸 오페라 자막을 작업하던 중 유의미한 공통점을 발견했다. 원작엔 없는 자막의 역할놀이가 그것이다.

지금의 사극과 달리, 조선 시대에는 부부간에 상호 반말 혹은 상호 존대를 했다고 한다. 문헌에 따르면 죽은 배우자를 그리며 ‘자네’라고 부르며 편지를 쓴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아내였다. 또 지금은 격 없이 아내를 부르는 말인 ‘마누라’는 조선 후기에는 아내를 뜻하는 극존칭으로 쓰였는데, 문헌에 ‘마누라께서는~’으로 시작하는 편지의 주인공은 공처가가 아닌 쇄국정책과 강력한 수권의 상징, 흥선 대원군이었다.

6·70년대 한국영화를 보면 남자주인공은 반말하는데, 여자주인공은 존대한다. 그 반대가 성립되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당시엔 사회 통념상 순종적이고 단아한 여성상이 이상형이었다 해도, 문제는 이 말투가 세월이 흐른 현대에서도 일종의 아내라는 역할의 기준으로 쓰인다는 점이다. 교양있는 집안의 부인역할은 거의 예외 없이 남편에게 존대를 한다. 상호 존대라면 더할 나위 없는 부부의 모습이련만, 남편은 늘 반말로 아내에게 말하는 걸 보면서도 그러려니 하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외화도 마찬가지다. 멜로, 드라마, 공포 등 장르 불문 한국어 자막에선 남자는 반말, 여자는 존대가 법칙처럼 존재한다. 원작의 국적과 상관없이 한국어 자막 상에선 남편은 아내를 다정히 반말로 부르고, 아내는 존대로 응한다. 당연하게도 원작영화에선 서로 반말이지만, 한국 자막에서만큼은 부부의 역할과 위상이 새롭게 정립된다. 물론 아내가 남편에게 반말하는 때도 있다. 파탄에 빠진 가정. 혹은 약물중독이나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설정이 부여된 경우, 또는 도드라지는 자존감의 꽤나 성깔 있는 커리어우먼을 그릴 땐 반말 자막으로 쓰인다. 어떤 모습의 여성이건, 원작과는 다르게 자막에서 새롭게 부여된 역할이다.

필자가 오래전 이탈리아 오페라 자막을 번역할 때 일이다.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의 달달한 대화 장면이었는데, 지난 칼럼에서도 다루었지만, 라틴어족인 이탈리아어는 엄연히 존칭과 경어체가 있다. 우리말처럼 주격과 동사가 달라지는 확실한 존대다. 세세한 쓰임새는 우리말과 차이가 있지만, 당연히 대본상의 원어는 연인 간 반말이어서 거기에 맞춰 번역했는데 제작사 쪽에서 난색을 보였다. 아직은 반말하는 여성상이 낯설어 쉽사리 공연용 자막으론 채택하기 어렵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남자에게 반말하는 여성은 교양과는 거리가 멀다는 암묵적인 룰인 것이다. 설사 연인관계라도. 원작에서 설정되지 않은 계급 관계가 자막을 통해서 새롭게 생겨난 셈이다. 그러다 보니 2막에서 남자 악역이 처음에는 여자주인공을 존칭으로 대하다 중반부터 본색을 드러내 여자에게 반말로 대하는 장면이 작품에선 긴장 구도가 달라지는 새로운 국면의 시작인데, 한국어 자막에선 초반부터 여자에게 고압적으로 일관되게 반말, 혹은 비아냥 가득한 존대로만 일관한다. 그저 전형적인 악역. 그리고 관객에게 익숙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일본 드라마나 영화엔 역할어(役割語) 개념이 있다. 시청자를 고려해 등장인물의 지위나 계층을 빨리 파악하게끔 언어적으로 미리 역할을 부여했던 표현방법인데, 외화에도 적용해 원작과 다르게 계층에게 맞는 말투로만 임의 번역한다. 그래서 일본작품에선 말투에서 이미 계급이 확연히 드러난다.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거친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예전 영화나 오페라 자막에는 원작에는 없는 “~굽쇼” 등의 강제 낮춤이나 압존법이 쓰였다. 그런데 요즘은 군대에서도 압존법 안 쓴단다.

꼭 사극이나 정극에서만 쓰인 게 아니다. 컬트적이고 괴팍한 인물들로 유명한 미국 애니메이션 ‘심슨가족’에서조차 남편 호머는 반말 자막인데, 마지 부인은 남편에게 꼬박 존댓말 자막이다. 이 글을 보는 독자 대부분도 지금에야 알아차렸을 만큼 몹시 익숙하다.

최근엔 현실적인 번역이 많아 반갑지만, 예전 영화는 여전하다. 하긴 새로 적용된 자막으로 예전 영화를 보면 낯설다. 그만큼 강력한 설정이었으니까

얼마 전, 필자가 작업하던 자막에서도 원작과 달리 남편은 반말, 부인은 존댓말로 쓰고 있었다. 이게 이상하다는 걸 2주 후에나 알아차릴 만큼 무의식으로 자리 잡았단 생각에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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