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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12월에 깨닫는 것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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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2.12.06 14:02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심리학자 프로이트와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시골길을 함께 산책하고 있었다. 여름의 시골길은 온갖 자연으로 무척 아름다웠다. 활짝 핀 여름꽃 위로 팔랑팔랑 나비가 더할 나위 없는 풍경이었다. 시인 릴케는 그 풍광에 온갖 찬사를 보내면서도 기뻐하지는 않았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 뒤에 겨울이 오면 이 눈부신 풍경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후일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그날의 산책을 회상하며 ‘덧없음’이라는 글을 썼다. 모든 사물은 결국 소멸하고 말기에 그 덧없음은 반박의 여지가 없으며, 아름다움도 예외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릴케의 슬픔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 덧없음으로 인해 아름다움의 가치가 더 커진다고 생각했다. 향유 할 수 있는 한계가 있기에 오히려 그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이십여 년째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내 화단이 텅 비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황국이 소담스럽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사라졌다. 된서리에 모두 흐물흐물 얼어 흉물로 방치되다 관리소 경비원 아저씨들이 땅속의 뿌리만 남겨놓고 모두 잘라 정리해 버린 듯하다. 지난 늦가을 내내 오며 가며 눈이 많은 호강을 누렸는데 어느새 휑뎅그렁한 화단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난 계절 내내 화려하게 피어 가을을 깊이 각인시켜주던 시간이 떠오른다. 좋은 기억이었다. 정신없이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발길을 멈추어 서게 만들어 주었고 가을도 상기시켜 주었다. 어느 작가가 말했듯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니고 피고 지는 자연이 시간 속을 흐르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한 시절에는 릴케의 슬픔에 동의한 적도 있다.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집 앞 쓰레기장에서 햄스터 한 마리를 데려온 적이 있는데 극구 키우는 걸 반대했다. 아이는 누군가 버린 것 같은데 불쌍해서 데리고 왔다며 키우게 해 달라고 며칠을 졸라댔다. 결국 집 안으로 들여 키우고 보살폈지만 몇 달 만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키울 때는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는 슬픔은 오래도록 길게 우리 가족들 곁에 남았다. 이후로 아이도 나도 집안에 새 생명을 들이는 일에는 늘 조심스러웠다.

이제 한 살 한 살 나이를 얹어가며 알아가게 되는 건 프로이드의 덧없음이다. 꽃이 피면 피는 대로 예쁘고, 지면 지는 대로 한동안 볼 수 없어 귀히 느껴진다. 화단의 황국도 그러했다. 한창 화려하게 자태를 뽐낼 땐 그 모습 그대로 보며 이쁘다 이쁘다 감탄을 했다. 경비아저씨들이 뿌리만 남기고 줄기를 모두 잘라낼 땐 잠깐 아쉽지만 땅속 깊은 곳에서 단단한 뿌리로 돌아오는 새봄에 만나자 마음을 보냈다. 텅 빈 화단이지만 나름대로 운치를 느껴보기도 했다. 일 년 열두 달 마냥 꽉 찬 공간이라면 비움의 미학을 깨닫기나 했을까.

아이는 기르던 햄스터를 떠나보내고 동물을 사랑하게 되었다. 꽃 한 송이에서 개미 한 마리까지 작은 생명도 귀하 여길 줄 아는 사랑스러운 아이로 잘 자라주었다. 나도 덩달아 그 마음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키워보고 떠내 보내보았기 때문이다. 덧없을 것 같은 순간들이 후에 더 큰 가치로 삶의 지표가 되었다.

산도 들도 쉬어가는 겨울이 한창이다. 숨 가쁘게 내달려온 달력도 어느새 한 장을 남겨두고 있다. 누군가는 다가오는 연말이 아쉽고 한 살 더 얹게 되는 나이가 씁쓸하다 아쉬움을 토로하지만, 그저 흘러온 시간은 아닐 것이다. 현재를 채웠기에 다음을 비울 수 있고 서로가 있기에 빛나는 것이리라. 사라진 것 같지만 사실은 저 깊은 어딘가에서 그것을 발판으로 다시 떠 오르는 것, 올해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올 한 해가 덧없음이었다면 그로 인해 더 아름다운 새해가 될지도 모른다고 12월을 보내며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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