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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영끌 회화

한보라 배재대 아트앤웹툰학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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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3.01.08 10:49
  • 기자명 By. 충청신문
▲ 한보라 배재대 아트앤웹툰학부 외래교수

급변하는 하이테크놀로지 시대에 회화의 생명은 어디까지일까? 많은 사람이 품고 있는 우려 섞인 궁금증이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들어 그에 대한 질문을 부쩍 많이 받고 있다. 누구는 생존을 놓고, 또 누군가는 진로를 놓고 그에 대한 불확실성을 토로한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는 그야말로 회화가 아니더라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편리성, 효율성, 생산성으로 무장한 디지털 콘텐츠들이 일상화되어 있다. 말 그대로 내 손 안에 스마트폰인 시대로 이젠 더이상 힘들게 수작업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더라도 클릭 한번에 누구든 쉽게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담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점의 그림을 탄생시키기 위해선 한필, 한필, 붓을 쥐고 적게는 하루에서 많게는 수개월이 걸린다.

반면 디지털은 앞서 말했듯, 간단한 조작과 기기만 있으면 회화로는 한 달이 걸리던 것이 클릭 한 번만으로도 가능하다. 그런 디지털을 상대로 회화가 경쟁을 해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문화체육관광부가 1월 4일자로 발표한 2022년 미술시장 매출 1조 돌파란 보도자료가 멀게만 느껴진다. 그렇다면 회화는 우리의 우려처럼 이대로 그 경쟁력을 잃고 사라지는 것일까? 필자는 그에 대한 우려를 씻어내기 위해 그 답을 현재도 미래도 아닌, 과거에서 찾고자 한다. 회화에 대한 위기는 오늘내일 일만은 아니었다. 이미 사진이라는 괴물이 세상에 등장을 하면서 그 위기는 시작이 됐다. 그래서 그 위기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그 답을 찾고자 한다.

1839년 사진기술의 등장에 당시 고전주의를 지향하던 낭만파 화가 폴 들라로슈는 ‘오늘부터 회화는 죽었다.’고 절망적인 목소리를 냈다. 당시 다른 전문가들의 견해 또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회화는 재현미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재현미술이라 함은, 실사 사물 또는 행위장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역할로 기록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보니 물체의 형상을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담아낼 수 있는 사진의 등장은 미술인들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오늘부터 회화는 죽었다’라는 낙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회화는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대적불가한 사진과 직접적으로 경쟁을 하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그동안 추구해 왔던 형태를 버림으로써 새로운 시도를 시작했다. 사실적 묘사에서 벗어나 추상적인 개념으로 정서를 시각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현대의 비구상화인 추상화이다. 그 덕에 현재까지도 회화가 사진보다 더한 디지털 홍수 속에서 시각예술의 모태로 그 명맥을 유지하며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이유다. 만약 그 당시 변화하는 시대를 인정하지 않고 재현미술을 고집해 사진과 경쟁을 하려 했다면 어떤 결과로 이어졌을까? 초기 흑백 사진에 어느정도 색감적 우위는 유지할 수 있었을 지언정, 스스로 자초한 선택적 고립에 필연적으로 다가올 기술의 발달을 이기지 못하고 곧 고사됐을 것이다. 필자는 그 대목에서 답을 찾고자 한다. 고집은 스스로를 고립시켜 도태를 맞게 만든다. 피할 수 없다면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회화가 처한 위기감 또한 그 속에 답이 있고 미래 회화의 존립 역시 그 속에 답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회화란 그 가치로 중요한 것이지 도구와 환경은 중요하지 않다. 그 형태를 유지하고 그 가치를 이어갈 수만 있다면, 굳이 붓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동안 오랜 세월 숙련된 내 친숙한 것을 내줘야 하는 아쉬움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되는 어려움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존립을 위해선 시대를 받아들여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답이다. 단편적인 예로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디지털 페인팅이나 NFT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회화의 기초적 지식이 없고서는 디지털 페인팅을 소화할 수 없다. 회화 역시 그러하듯, 무턱대고 그린다고 해서 다 작품이 되지는 않는다. 그리는 도구와 환경만 다를 뿐 표현하는 이해도는 그 감각적 성향이 같다. NFT 역시 접근적 환경과 방식만 다를 뿐, 기존의 그림 시장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아직은 기존 미술인들이 접하기엔 생소하고 익숙지 않은 환경에 어색할지는 모르겠지만 미래 회화에 있어 한 축으로 자리 잡을 것을 현대인 그 누구도 의심치 않는다.

결국 회화의 존립은 시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시대에 편승을 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필자 역시 쿨한 척 말은 긍정적으로 하더라도 급변하는 세상이 그 누구 못지 않게 두렵고 무섭다. 특히 10년 후, 20년 후, 내가 늙어 갈 것을 생각하면 다가올 미래는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호러영화다. 그 호러영화와 같은 미래에 회화가 어떤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다가올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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