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부터 지금까지 개봉된 한국영화 중에 손익분기점을 넘은 영화가 없단다. 들리는 얘기론 이미 후반 작업까지 마친 영화들도 같은 이유로 개봉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데 더 큰 문제는 수익성 문제로 투자도 확 줄어서 제작에 안 들어간단다.
모든 작품이 블록버스터 대작일 수 없기에 만듦새가 조금 덜하고, 규모가 작아도 사람들이 봐주던 시절에는 신인 감독이나 배우, 제작사들이 성장할 여지와 틈새가 있었다. 그런데 이젠 사람들이 그 돈을 내고는 안 본다. 기왕 오를 대로 오른 비싼 가격으로 영화를 봐야 한다면,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은 블록버스터 대작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여건에나 돈을 지불하겠다는 심산이다. 역대 흥행수익 10위 중 6개가 이런 초대형 판타지, 슈퍼히어로물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독립영화나 저예산 영화들은 상영관을 잡기가 더 힘들어졌다. 간신히 상영관에 걸어놓아도, 사람들이 찾지 않기 때문이다. 나중에 OTT 서비스로나 보겠다는 심리다. 돈을 많이 들인 작품이 돈을 더 가져간다. 이른바 ‘될놈될(될 놈은 된다)’이다.
영화 이전에 유럽 엔터테인먼트의 정점은 오페라였다. 사람들이 좋아할 법한 이야기에 춤과 노래, 그리고 멋들어진 웅장한 배경음악까지 갖춘 이 종합예술은 17세기와 함께 시작되어 20세기에 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정상의 인기를 구가했다. 오페라가 등장하던 시대엔 연극과 음악회와 발레 공연 등을 제대로 상연할 수 있는 극장이나 연주회장이란 개념은 고사하고, 일반 서민은 이런 문화생활을 직접 눈으로 접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오페라 소재는 당시로써는 판타지물로 취급되던 그리스 로마 신화 소재였다. 인간사 해결이 안 되는 복잡한 일들도 그저 제우스의 번개나 아폴로 등장이면 교통정리 시킬 수 있으니 여러모로 참 편리했다. 이후로도 주류 오페라는 성서, 셰익스피어나 빅토르 위고 등 당시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원작을 소재로 삼았고, 사람들은 구질구질한 일상을 뒤로하고 웅장한 대리석 극장에서 화려한 귀족 상류사회나 그리스 로마 신화, 혹은 신들의 성 발할라가 불타는 장면을 블록버스터로 즐겼다.
그 와중에 프랑스의 주목받던 작곡가의 오페라가 논란이 되었다. 초연 평은 ‘한마디로 실패작, 재앙이다. 공연은 오래 못 간다.’ 였고, 공연 도중에 자리를 뜨는 관객이 더 많았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작곡가는 시름시름 앓다가 석 달 후에 사망했다. 이 작품이 현대엔 뮤지컬과 영화로도 계속 변주되는 비제 불멸의 명작 카르멘이다.
당시 신화나 화려한 상류계급을 그려내던 오페라 무대와 달리 카르멘은, 첫 장면부터 담배공장 여공들이 담배를 피우고, 비련의 여주인공은커녕 세관을 등쳐서 밀수를 밥 먹듯이 하다 길바닥에서 싸움판을 벌이는 집시가 여주인공이다. 남자주인공은 멀쩡한 약혼녀를 두고 집시여인에게 빠져 영창에 갔다가 탈영하고 밀수꾼이 되어 떠돌다가 결국 질투에 여주인공을 죽인다. 거기에 음악은 낯선 음계와 편곡으로 작품의 배경인 스페인은커녕 프랑스 음악은 더더욱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의 관객들에게 이런 파격적인 서사와 음악이 받아들여질 리가 만무했고 철저히 외면당했다. 비슷한 작품으론 돈을 지지리도 못 버는 소위 예술가라는 남자 네 명과 경제적 독립이 불가능한 여자 둘의 뒷골목 이야기를 그린 작품도 있었다. 그게 바로 푸치니의 ‘라보엠(보헤미안)’ 이고 초연 성적도 형편없었다.
당대의 흥행코드가 아니었지만, 현실의 일상과 세태를 그려내려 했던 이 작품들은 훗날 베리즈모(현실주의) 오페라의 발전과 흥행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그 자체로도 명작의 반열로 남았다. 비주류로 출발했던 작품들이다.
역사상 최초의 밀리언셀러 음반은 엔리코 카루소의 ‘의상을 입어라’라는 베리즈모 오페라 ‘팔리아치’의 아리아다. 비주류 인생을 처절히 토해내는 음악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