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질투란 ‘나 자신’에 초점을 맞춰 ‘이웃이 지닌 것을 자신이 소유하지 못해 슬퍼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는데 흔히들 질투를 나쁜 의미로만 해석하고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본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무언가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면 내가 그것을 향해 노력할 수 있고 그것을 목표로 삼아 더 발전할 수도 있어서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진다고 하였다. 2009년 Cohen–Charash의 연구에서는 질투의 정도가 높을수록 질투 대상과의 차이를 줄이고자 하기에 자기 향상을 추구하는 행동이 많이 나타난다는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러므로 질투는 부정적인 정서와 역기능을 가지기도 하지만 타인과 비교하면서 나도 비슷한 수준에 도달하고 싶다는 동기를 가지게 되고 이것을 행동적으로 실천하게 하는 긍정적 측면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질투와 부러움의 차이는 무엇일까? 질투는 경쟁자가 누구든 간에 원하는 대상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부러움이란 경쟁자에게 초점이 맞추어지기 때문에 부러움의 대상이 경쟁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면 부러움을 안 느끼지만, 경쟁자가 그 대상을 가지는 순간부터 부러움을 느끼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 시기는 또한 무엇일까? 시기는 남이 잘되는 것을 부러워하여 미워하는 것이고 하는 쪽이나 받는 쪽, 모두에게 비생산적이다. 즉, 시기를 받게 되면 공격의 대상이 된다. 자신은 상대에게 어떤 해가 되는 나쁜 일을 한 적이 없는데도 상대의 시기로 인하여 험담과 추악한 소문에 중심이 되고 더러는 나 자신도 근거 없는 말로써 남을 헐뜯고 사실을 왜곡하거나 속임수로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게 된다. 결론적으로 시기하는 쪽은 온통 신경과 시선을 상대에게 둔 나머지 정작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몰입할 수 없고 불필요한 시간 낭비, 에너지를 낭비함으로써 자신의 성장에 엄청난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영국의 수필가 조지프 애디슨은 ‘질투는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는 사람에게, 동등하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염려에서 인간이 느끼는 고통이다’라고 하였다. 가끔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조직이 동물의 왕국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여자의 질투보다 남자들의 질투가 더 무섭다고 느껴진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분쟁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꼴 사나운 질투의 표본이 아닐까!
성 바실리오 성당의 수도 규칙에는 ‘녹이 쇠를 좀 먹듯이, 질투는 그것에 사로잡힌 영혼을 병들게 한다.’라고 되어있고, 고대 로마시대 시인 호라티우스는 ‘질투심 많은 사람은 이웃 사람들이 살찔 때 마르게 된다.’라고 말하였다.
부정적인 질투와 상대방에 대한 부러움은 자기 상황과 조건이 만족하지 못할 때 내 자신으로부터 발생한다. 이것은 욕심이다. 그러므로 자기 부족함과 욕심은 모두가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다. 따라서 해결책은 자기 부족함을 보완하거나 또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질투와 부러움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질투는 나의 내적 우월감이 강할 때 생겨나고 부러움은 약할 때 생겨난다고 한다.
요사이 내 자신에게도 훈훈한 변화의 움직임이 작동되어지고 있다. 숫자에 연연한 정년에 대한 연민을 버리고 역동적인 하루를 설레는 맘으로 맞이하고자 노년기의 열정에 긍정적인 질투의 불씨를 지핀다. 아울러 내 삶에 인간적이고 입체적인 면을 덧붙이고 또 다른 매력적 부러움을 위하여 100세를 향한 버킷리스트를 지금부터 설계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