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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속으로] 베수비오 화산

이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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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4.02.05 13:23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이혜숙 수필가
도시를 내려다보며 우뚝 서 있는 산. 위협적이지 않을 것 같은 산이 무서운 힘을 내포하고 있다니. 악몽 같은 사연을 간직한 채 호시탐탐 힘을 발휘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 같다.

어떤 가이드는 설명하는 대신 영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폼페이 최후의 날의 끔찍한 장면을 본 뒤 머리에 총 맞은 느낌이 들었다. 자연재해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한없이 초라한 무력뿐이다. 화산 폭발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인간의 탐욕과 권력을 이용한 잔인함을 보았다. 어느 나라든 권력을 가진 자는 권력이 없는 자를 박해하고 짐승처럼 학대하는가 보다. 그러나 엄청난 자연재해 앞에서는 권력을 가진 자나 권력이 없는 자나 똑같이 주검을 맞는다. ‘폼페이 최후의 날’ 영화장면이다.

권력자는 노예들을 감옥에 가두어 놓고 로마군과 결투를 하게 한다. 결투에서 진 노예는 가차 없이 주검을 맞는다. 그 모습에 환호하는 시민들. 인간의 잔혹함이 고조에 오를 때 베수비오 화산이 움직였다. 그동안 잠자고 있던 화산이 짐승 같은 행태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터져버렸나 보다.

피할 시간조차 없이 결투장과 도시를 삼켜버렸다. 화산 폭발로 아비규환이 된 상황에도 상생은 없었다. 장군들은 자신들만 살려고 밀려오며 길을 막는 시민을 무참히 살해했다. 살려고 발버둥 치느라 밀고 밀리는 모습에서 작년에 일어났던 이태원 참사의 현장이 겹쳐진다.

꿈에서만 볼 거로 생각했던 도시를 다니면서 인터넷에서 본 사실을 확인하는 여행이 설레기도 하지만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 더 가슴 떨렸다. 어릴 때 지도에서 보고 끝인 줄 알았던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점점 세계 역사에 관심이 깊어졌다.

폼페이 발굴 장소에 내가 서 있다. 폼페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베수비오 화산이 위엄을 자랑하듯 우뚝 서 있다.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많은 시민이 7m 이상의 화산재에 파묻혀 사망하였다. 18시간 만에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오랫동안 역사에서 잊힌 도시 폼페이.

땅속에 묻혀 있어 도시가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도시. 화산 폭발 후 15세기까지 폼페이의 존재는 사람들에게서 잊혔다. 그러다가 1592년 이탈리아에서 수로 건설을 목적으로 땅을 파다가 폼페이의 유적이 발견되어 당시의 모습이 세상에 나왔다. 1592년이면 우리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고초를 겪던 시기다. 나는 세계사를 들을 때마다 그와 맞닿은 시기의 우리나라 역사를 생각하게 됐다. 우리가 고군분투할 때 이들은 사라진 도시를 복원하기 시작해서 지금도 진행 중이다.

폼페이는 로마 지도자들이 휴양지나 별장 등이 많은 곳이다. 사시사철 해가 뜨기 때문에 건강에 좋을 뿐만 아니라 겨울에도 화산의 지반 열이 있어 그다지 춥지가 않았다.

폼페이에는 광장, 공중목욕탕, 신전, 원형 극장, 의사당, 매음굴을 볼 수 있다. 발굴된 도로는 지금도 그 시절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줬다. 그 시대에 수도시설이 있었고 술집이 있었으며 귀족들이 마차로 다녀 팬 길도 그대로 있다. 얼마나 견고했는지를 하나도 손상이 되지 않은 모습이다. 수도시설이 있었던 것에 반해 하수 시설이 없어 오물은 그냥 길에 버렸단다. 그래서 오물에 맞지 않으려고 양산을 썼고 오물에 발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하이힐을 신었다 한다. 그렇게 발전했을지라도 화산의 재해를 피하지 못해 사라진 도시. 우주에서 지구는 아주 작은 것 같은데 이렇게 와서 보니 여기에 서 있는 내가 개미처럼 작게 느껴질 정도로 광대하게 생각된다.

화산이 폭발하기 전에 지진이 있었다. 그로 인해 사람의 화석(?)이 고스란히 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의 모습이 흔적도 없고 구멍을 보여 석고를 부어 꺼냈더니 사람의 모습이었단다. 현재 3개의 석고상이 유리관 속에 넣어져 관광객을 맞는다. 그 모습에 온몸이 전율하는 것 같다. 무섭다고 느낄 겨를도 없이 앗아간 목숨. 베수비오 화산의 마지막 분출은 제2차 세계대전 말이던 1944년이고 아직 분출은 없다. 그러나 언제 재앙이 닥칠지 모르는 살아있는 휴화산.

1748년, 부르봉 왕가의 나폴리 왕인 카를로 3세가 여러 가지 유적을 발굴했다. 몇 세기가 지나가는 동안에도 유적은 재로 된 장막 아래 완벽하게 보존된 상태로 존재해 있었다. 한창 전성기였을 때 갑자기 멸망해버려 전성기 로마의 유물과 유적들이 잔뜩 남아 역사적으로 엄청난 가치가 있다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발굴되고 있다고 한다. 사회 개혁, 경제 발전, 문화 발전에서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던 조선 21대 왕 영조의 시대와 맞물리는 시기다.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겹치면서 넓은 광장은 젊은 노예를 가두어 놓고 싸움하라고 강요하던 곳이려니 했다. 높은 곳에 앉아서 인간끼리 싸우게 하고 죽게 만드는 못된 권력자들이 보이는 것 같다. 환락의 도시, 권력자들의 놀이터(?), 계속 발굴하겠지만 현재 발굴된 모습만 봐도 그 시절의 사람들의 생활상이 보이는 듯하다.

대단한 건 수도시설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수도관이 납으로 되어있어 납 중독된 사람도 많았다. 그렇더라도 그 옛날 수도시설을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우리나라는 고대국가 시절이니 개울물을 먹고 쓰던 시절이겠지. 산골 출신인 나는 성인이 되어서 수돗물의 혜택을 받았는데.

더 보고 싶은데 여행사의 일정에 밀려 돌아서야 하는 상황이 안타깝다. 여행하면서 세계의 역사를 조금씩 배우고 이해하는 것이 행복의 척도가 된 것 같다. 구경만 하는 여행에서 세계 역사를 배우는 여행이 되었다. 언어가 자유롭지 못하니 자유로운 여행은 언감생심이다. 부지런히 공부해도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언어. 자유로운 언어로 세계를 누빌 수 있는 날은 오기나 하려는지.

지금은 속박이 없는 사회지만 영화 속에서 ‘나는 자유의 몸으로 죽는다.’ 외치며 용암 속으로 빨려 생을 마감하는 흑인 노예의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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