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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액땜

서필 목원대 교수·테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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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0.12.15 14:40
  • 기자명 By. 충청신문
서필 목원대 교수·테너
서필 목원대 교수·테너
연주자들은 보통 한두 개쯤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 공연 직전에 초콜릿을 먹었는데, 공연 때 목구멍에 남은 걸쭉한 존재감에 제대로 발성이 되지 않아 공연을 망치게 된다면 이후로는 공연 전에 점성이 강한 음식을 의식적으로 피하게 된다.

반대로 특정 음식이나 행위들이 공연에 도움이 되었다면 이후로는 반드시 그 루틴을 반복하여 공연 전 준수할 리스트로 여기기도 한다.

전설적인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공연 전에 구부러진 못을 찾아 헤매는 징크스가 있었는데, 우연히 무대 뒤에서 구부러진 못을 발견한 날의 공연이 성공적이어서 이후에 계속 오페라 세트 뒤쪽에서 구부러진 못을 찾아다녔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공연마다 구부러진 못에 집착하는 파바로티의 징크스를 확인한 에이전시에서 티 나지 않게 구부러진 못을 뿌려두고 먼발치서 지켜보다 파바로티가 못을 찾으면, 남은 못들을 몰래 수거했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 원로 프로야구 감독은, 연승을 하던 날에 있었던 모든 행위를 징크스 삼아 반복했다고 한다. 메뉴와 숙소. 심지어 숙소에서 경기장으로 가는 운행코스들까지 그대로 루틴을 지켰지만, 연승이 끊기면 그 즉시 지금까지 행했던 모든 루틴을 뒤집어, 패전 후 경기장에서 숙소로 가던 버스의 운행코스를 즉시 바꾸라고 지시했던 이야기는 지금도 전설처럼 내려온다.

이렇게 징크스는 어떤 행위나 생각들이 결과에 긍정적이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때 나중에 그 기재들을 기억했다 다시 사용하거나 꺼리는 등으로 이루어진다. 어쩌면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을 다 준비하고도 모자라, 예상치 못한 상황마저 철저히 대비하고 싶은 조바심일지도 모른다.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는 무대 들어가기 전, 혹은 오디션이나 시험 직전에 연주자들끼리 보통 “In vocca al lupo! (늑대 아가리로!)” 라는 관용구를 덕담 삼아 서로 나눈다. 고대에 사냥꾼들이 사냥 전에 동료들과 나누던 말인데 위험한 상황을 정면으로 맞닥뜨려 이겨내라는 뜻 정도가 되겠다. 우리 속담인 ‘범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뜻과 어느 정도 맥이 통한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늑대가 죽으라는 뜻의 “crepi il lupo!” 라며 응수한다. 가만히 보면 군대에서 서로 암구호를 문답하는 모양새다.

독일어권 오페라 극장에선 무대 들어가기 직전에 연주자들끼리 가볍게 포옹하며 “Toi Toi Toi!” 라고 등 뒤로 읊조린다. 상대의 등 너머로 침을 퉤퉤퉤 뱉으며 나쁜 기운이 물러가라는 뜻인데, 본래는 숲에서 나무를 시끄럽게 두들기며 악귀가 그 시끄러운 소리에 깜짝 놀라 도망가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현대의 오페라 극장에서는 나무통을 들고 다니는 절차를 생략하고 상대방에게 붙어 있을 수 있는 악귀를 상대의 등 너머로 침을 뱉어 쫓아내는 모양새로 발전했다. 지금은 없어진 우리 풍습에도 나쁜 기운을 물리치거나 재수가 없는 일을 당하고 나면 소금을 뿌리며 액땜을 하던 의식이 있었다. 침과 소금이 살균효과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묘하게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프랑스어 권은 좀 더 직접적인데 “merde!” 라며 ‘대변’을 뜻하는 단어를 서로 나눈다. 나쁘고 더러운 것들을 직접 말해서 되려 털어내 버린다는 의미인데, 같은 라틴어 계통인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에서는 여기서 좀 더 나가서 mucha 나 muita 라는 표현을 덧붙여 ‘더 많이’ 더러운 것을 털어 내자라고 쓰인다.

영어권은 통상 “Break a leg!” 라며 행운을 빈다. ‘다리나 부러져라’라는 표현이 역설적으로 행운을 빈다는 덕담으로 쓰이게 된 유래는 꽤 복잡하다. 다리 부러진 배우가 그날 공연이 대성공해서 이후로 계속 쓰였다는 설과 셰익스피어 시대 연극무대의 커튼콜 때, 박수 대신 발을 시끄럽게 굴러 환호성을 표현하던 것을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발을 격렬하게 구르는 환호를 받아라’ 정도의 표현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현대에는 그 기원을 독일어권이나 라틴어권처럼 차라리 나쁜 말을 미리 해서 정반대의 좋은 결과를 얻어낸다는 뜻으로 우리의 액땜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래서 세계대전 시 전투기 조종사들은 출격 전에 파일럿들끼리 ‘목이랑 다리 부러져라’라고 하며 기체는 물론 조종사의 무사귀환을 빌었다고 한다.

침을 뱉건, 늑대 아가리로 들어가건, 다리가 부러지건, 뭐든 좋으니 새해엔 액땜 한마디로 망할 코로나가 제발 도망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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