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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여행… ‘이동백 생가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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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08.03.11 18:53
  • 기자명 By. 충청신문/ 기자
한 밤을 긁어대는 해금 소리가 처량하다.

가야금 병창은 어떻고, 아쟁 소리에 이르러서야 겨우내 웅크리고 앉아 청승을 떨던 내 모습이 가장 처량했음을 알게 된다. 소리 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다.

3백 년 판소리 역사에서 광대로, 명창으로 시대를 풍미했던 소리광대는 누구였을까? 그들의 독공과 득음 그리고 풍부한 성음을 연마하고 새로운 장단이나 더늠을 창조했던 그들이 살아낸 삶의 이면에는 열정과 현실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으리라.

충남도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

햇살이 푸른빛을 쏟아 내며 머리를 풀고 있다. 성음을 가다듬기라도 하듯 검은 새, 흰 새 동백정을 가로지르고 희리산 자락이 손바닥을 길게 뻗어 아늑한 마을로 인도하였다. 신미양요(1866년)가 일었던 해에 태어나 소리로 통정대부를 살았던 명창 이동백.

그 장건한 체격은 당당한 위장부이다. 대하면 일종의 불가침할 위의(威儀)가 있는 듯하다. 성음이 극히 미려하거니와, 그 각양각색의 목청은 들을 때마다 청신한 느낌을 준다.

(조선창극사.정노식저)·훌륭한 광대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가 인물치레, 둘째가 사설치레, 셋째가 득음, 넷째가 너름이라 하였는데 이 네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춘 이동백은 13세 때에 장항에 살던 김정근 문하에 들어가 몇 달간 소리 공부를 하고 김세종 문하로 들어가 5년쯤 공부를 한 후 용담굴로 들어가 독공으로 소리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소리에 부족함을 안 이동백은 많은 선배들이 홀로 수련을 쌓아 득음했다는 것을 알고 선생보다는 유랑을 선택하여 가객들의 본거지인 진주에 머물게 되었으나 다시 부족함을 느껴 이곡사라는 절로 들어가 3년간 더 공부를 한 후 득음하였다.

그의 장기는 <새타령>이며 고종은 그를 특히 사랑하여 통정대부라는 벼슬을 내렸고 어전에서 소리를 하게하였다. 이동백의 소리는 특이했다.

그의 스승인 김정근의 아들 김창룡과 다르고 김세종과도 달랐다. 그의 독득한 성음은 청중을 단숨에 제압하는 힘을 지녔고 화려하고 절묘한 묘사음으로 새타령을 부를 때에는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소리를 낼 때 평평하게 시작하여 중간을 높이고 끝을 낮추어 끊는 것이 특징인 중고제의 명창 이동백 생가는 주인이 몇 번 바뀌며 짓고 허물어져 지금은 번듯한 양옥이 자리 잡고 있다.

남의 마당이 되어버린 장소에 기념비하나 덜렁서 있고 새로운 명창을 기다리는 듯 천연기념물 제169호로 지정된 500년 마량리 동백은 만개하다 처연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육근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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