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미생’을 처음 만난 게 2년 전 이맘때다. 한국기원이 발행하는 월간지 ‘바둑’ 표지가 만화 주인공 얼굴이었다. 바둑 만화 주인공이겠거니 여겼다. 그런데 얼굴의 주인공이 장그래이며, ‘이끼’로 유명한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의 주인공이고, 바둑 프로기사 입문에 실패한 주인공이 종합상사에 입사해 적응해가는 얘기라 했다. 차근차근 설명해주던 후배는 한 마디 덧붙였다. “직장인들 사이에선 ‘필독 만화’입니다.” 이 ‘미생’이 요즘 케이블 TV 드라마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만화든 드라마든 인기를 끄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재미있든지 공감을 얻든지. ‘미생’은 후자에 무게가 실린다. 드라마의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 같다는 반응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미생’은 바둑용어로 아직 살아있지 못한 상태, 즉 두 집을 내지 못한 걸 말한다. 오 과장은 말한다. “이왕 들어왔으니 어떻게든 버텨봐라. 여긴 버티는 게 이기는 거야. 버틴다는 건 어떻게든 완생(完生)으로 나간다는 거니까. 바둑에는 이런 말이 있어. 미생, 완생. 우린 아직 다 미생(未生)이야!”
▷‘미생’에서 직장은 바둑판이요, 바둑판 직장은 그야말로 사활을 건 전쟁터다. 상사와 부하직원, 정규직과 비정규직, 공채와 낙하산, 남자와 여자 사원들이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고 견제하고 따돌림을 견딘다. “열심히 안 한 건 아니지만, 열심히 안 해서인 걸로 생각한다”는 초년병의 넋두리에 공감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을’이 되어 분노한다. 고수가 하수에게 몇 수 전할 때, 서로 힘을 합쳐 일을 이루는 판타지엔 대리만족도 얻는다. 그래서 주말이면 ‘미생’에 눈도장을 찍는다.
▷만화 ‘미생’은 200만부 판매를 돌파했고, 원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과거를 그린 모바일 드라마도 인기 폭주다. 만화에 드라마에 쏠리는 관심은 이제 사회적 트렌드가 됐다. 직장인보다 정치인들이 봤으면 좋겠다. ‘미생’에는 어디에서도 위로 받지 못하는 직장인들의 애환과 고단함이 읽힌다. 이 ‘밥벌이의 씁쓸함’을 알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걸 안다면 담배 한 모금의 위안도 주지 못하는 정치인들이, 그것도 한꺼번에 담뱃값을 2000원씩이나 올릴 생각은 차마 하지 못할 것이니.
안순택 <편집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