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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아침에] 절제는 지성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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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6.05.22 15:26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정 관 영 충청대 겸임교수

절제의 아름다움은 건축이나 미술, 문학 등에서 간결함이나 여백으로 드러난다. 세상은 욕망과의 다툼이 치열한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을 감싸는 건축가의 창의적인 설계, 작가의 자기 절제를 통하여 여유 공간을 이웃에게 열어놓는다.

절제는 멈추어야 할 때를 아는 지혜이며 멈출 수 있는 용기이다. 마음과 생각, 언어, 영적인 삶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절제는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버팀목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성장하여 어른이 되면 가장 좋다고 여기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착각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렇게 교만하고 이기적인 존재가 어떻게 자기를 제어하고 성숙함을 이루어갈 수 있을까.

아무리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라도 절제라는 바구니에 담기지 않으면 도를 넘게 되어 결국 덕이 되지 못함을 삶의 현장에서 종종 경험한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절제가 익숙하지 않다. 그러기에 절제는 든든한 울타리처럼 경계를 이루고 도를 넘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마음과 몸과 생각 그리고 입술마저도 이기적 욕심과 교만함에 의하여 통제를 받기 때문이다.

개인주의가 도를 넘은 시대정신도 절제의 미덕을 밀어내는 환경이다.

절제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문명의 이기라도 결국은 흉악한 무기로 변질되게 마련이다. 전화가 사람들 사이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한 문명의 이기임에 틀림없지만, 보이지 않는 상대방에 대해 위협과 막말을 쏟아냄으로써 주눅 들게 한다면 어찌 전화를 흉기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시위현장에서 촛불을 들었다고 해서 저급한 의사 표현이나 거친 말을 할 수 있는 ‘도덕적 특권’을 가진 것은 아니지 않는가.

물론 우리나라는 언론의 자유도 있고, 표현의 자유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절제 없이 다 표현할 수 있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때 장안의 화재가 되었던 모 재벌그룹 회장의 ‘조폭놀음’도 지나친 자식 사랑에 눈이 멀어 빚어진 사건이다. 그가 더욱 비판받는 것은 10위권 재벌을 이끄는 총수로서 갖춰야 할 절제의 덕목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의 저급한 행동을 보면서 몇 년 전 미국 버지니아공대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장례식장에서 보여 준 절제의 참모습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버지니아공대 희생자 부모들은 장례식장에서 소란을 피우는 대신 행사장에서 가족끼리 조용히 포옹한 채 어깨만 들썩이며 슬픔을 삼켰다. 그들은 ‘범인을 찾아내 맞은 만큼 패주는 식’의 무절제한 보복을 선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용서는 살아 있는 자들의 최대 특권”이라며 그 상황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관용의 모습까지 보여 주었다.

미국인들은 과거 뉴욕에서 있었던 9·11테러 때도 오클라호마의 연방청사 건물 폭파사건 희생자 추모식 때도 그랬다. 그들의 절제력은 보는 이들이 감탄할 정도였다.

미국의 힘이 어디에서 솟아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의 힘은 월가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요 초대형 항공모함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극기하고 절제하는 그들의 공공을 우선시하는 공동체적 신사도정신이 미국 사회의 힘이 아닐까.

우리의 경우 과거 민주화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절, 국민이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저항수단은 격정적인 투쟁이었다. 절제를 벗어난 행동이 어느 정도 용납되고 심지어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민주화된 지금까지 그런 구습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원로 철학자인 한 석학은 한국인의 성격을 지나친 감수성을 우리의 약점 중 하나로 들었다. 최근의 여러 사회적 현상을 보면 정확한 지적이다. 감수성이 너무 예민하면 절제와 극기보다는 격앙과 감정의 발산이 더 쉽게 나타난다. 또 경박한 감상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이성적 판단보다 감정에 의해 개인적, 사회적 오류가 발생하기 쉽다.

일류 국가의 잣대는 얼마만큼 정신적으로 균형 잡힌 지혜가 사회를 이끌고 있는가, 어느 정도 원숙하고 절제된 정서가 사회를 지배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미국 버지니아공대 사태는 바로 그런 차원에서 그들의 강점과 아름다운 점들을 보여 주는 절제의 미덕이다.

절제의 미덕은 우리의 삶 가운데 미래를 위한 건설적 에너지로 승화되지만 격앙은 개인과 사회를 파괴하는 에너지로 작용할 뿐이다.

솔로몬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라고 했다. 사람은 마음에 옳다고 여겨도 그대로 살지 못한다. 절제가 인격적인 영역이며 지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정 관 영 충청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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