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항서원은 1570년(선조 3) 호서지방에서 보은의 상현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건립된 서원으로 창건 당시의 이름은 유정서원(有定書院)이었다.
창건 당시 청주를 대표하는 사림들이 참여해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 강수(江叟) 박훈(朴薰), 남계(南溪) 경연(慶延) 등을 배향했다.
이후 충암 김정, 송재 한충, 천곡 송상현, 서계 이득윤, 율곡 이이, 목은 이색을 차례로 추가 배향해 모두 아홉 명의 인물이 모셔져 있다.
청주 지방 유림의 사액 요청으로 1660년(현종 1) ‘신항(莘巷)’이라는 사액을 받으면서 신항서원으로 불리게 된다.
‘신항(莘巷)’의 ‘신(莘)’은 ‘이윤(伊尹)’이 탕 임금을 만나기 전에 도덕을 갈고 닦으며 살았던 마을인 ‘신야(莘野)’의 ‘신’자이고, ‘항(巷)’은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이 학문을 연마하면서 살았던 누항(陋巷)의 ‘항’자이다.
즉 신항이란 도덕을 닦고 학문을 연마하는 곳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항서원은 창건 이후 지역의 스승을 모시는 제향공간인 동시에 지역의 교육과 여론을 주도하는 문화 중심지의 역할을 했다.
신항서원에 배향된 9명의 인물 중 이이와 이색을 제외한 나머지 7명의 경우 17세기 청주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선비로서 청주에 성리학을 뿌리내린 인물들이다.
또 이들은 학자, 충신, 청렴인, 선비 등 일정한 사표가 되는 인물들로 현대 지역민이 추구해야할 인간상과 윤리 도덕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지역 성현을 추존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그 배향 취지와 가치를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시킬 필요성이 있다.
신항서원은 1871년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비록 다시 복원됐지만 이후 지금까지 140여 년간 서원 본연의 역할을 회복하지 못한 채 그 빗장이 굳게 닫혀 있다.
이에 충북학연구소에서는 닫혀있는 빗장을 열고 신항서원의 현재적 가치와 의미를 찾고자 ‘신항서원 달빛기행’을 진행한다.
충북학연구소 김양식 소장은 “신항서원의 활용과 활성화를 통해 선비정신을 현대적으로 고양하고 인문학 및 인성교육의 장으로 지속적인 활용방안 모색이 필요하다” 며 “선비정신, 더 나아가 전통적인 유학의 현대적 가치를 확산시켜 나가는 구심점으로 삼아 지역에 대한 지역민들의 자긍심 고취에 일조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