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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으로] 산소 같은 그 남자

이혜숙 음성수필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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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9.05.10 23:34
  • 기자명 By. 충청신문

 

언제부터인지 마스크를 해야 했고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희뿌연 미세먼지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에게 우울함을 안겨준다. 연신 경보음이 울리며 마스크를 쓸 것과 밖의 활동을 자제해 달라는 문자가 뜬다. 짙은 미세먼지 속에서 탈출하기로 했다.

남편과 함께 여행한지 오래되었다. 시간이 있을 때 떠나자고 했다. 청정지역인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를 돌아보는 여행이다. 영어가 서툴러서 자유여행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오후에 출발하는 비행기이지만 오전에 집을 나섰다. 창밖은 뿌옇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미세먼지들이 내게로 달려온다. 눈과 코와 입이 미세먼지로 근질거린다. 얼른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영어권으로 여행을 간다고 입국심사영어와 현지에서 간단히 주문할 수 있는 문장들을 공부했다. 그전에는 입국심사 하는 사람이 뭐라고 해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 답답했다. 그래도 간단한 입국심사영어는 구사하리라 마음먹고 부지런히 공부했다.

예상은 늘 빗나가기 마련인가보다. 입국심사대를 지나가도 그 나라 심사원은 말을 한마디로 하지 않는다. 눈짓만 할 뿐. 심사대에서 구사하려했던 말은 한마디도 필요치 않았다. 남편에게 열심히 공부한 영어를 쓸 필요가 없어졌다고 하면서 웃었다.

오클랜드 공항을 빠져나오니 피켓을 들고 가이드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조용한 말투 때문에 귀를 기울여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렇게 점잖은 사람이 가이드를 한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대부분 처음 만남에 서먹한 분위기를 상쇄하고자 가이드가 설레발을 친다. 그런데 이 가이드는 점잖은 것은 고사하고 말투도 어눌하다. 사람에게 하는 존칭을 사물에게도 적용했다. 조사를 쓰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단어구사가 영 맞질 않았다.

이상하면 절대 그냥 넘어가질 못하는 나는 제대로 된 한국어를 가르쳐주었다. 처음에는 조금씩 따라하는 것 같더니 도루목이다. 말만 어눌한 게 아니라 일본식 발음이다. 살았다는 사르셨다. 저녁 먹으러 가자는 말을 저녁 가요로. 비싸다는 말을 돈이 많다고 말한다.

한국어 구사도 못하면서 어떻게 가이드를 하는지 궁금해서 호구조사에 돌입했다. 한국어가 서툰 이유는 무엇이냐. 왜 일본식 한국어를 구사하느냐. 그랬더니 초등학교 때 뉴질랜드로 이민 왔단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오래 사셔서 그 영향으로 일본식 발음이 입에 붙었다고 했다.

사람은 살고 있는 땅의 기운을 받는다고 한다. 청정한 땅. 복지국가로 으뜸인 나라. 그곳에서 어릴 때부터 받은 교육영향인지 말만 어눌할 뿐 사람이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다. 순수하다 못해 산소를 내뿜는 것 같다.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돈을 덜 쓰게 하기 위해 아무 곳에서나 물건을 사지 못하게 했다.

외국에 살면 모두가 애국자가 되나 보다. 이 가이드도 교포로서 고국을 생각하는 마음이 매우 크다. 소, 양, 말 등을 방사로 키우는 이곳에서 우리나라로 소를 수출하면 걱정이라며 잘해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 한다.

뉴질랜드의 청정한 공기를 닮은 그 남자의 한마디 한마디가 정성스럽고 애틋하다. 정성을 다해 고객을 대하려는 마음이 느껴진다. 패키지여행에서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 쇼핑센터다. 여느 가이드는 하나라도 더 사라고 말하는데 비해 그 남자는 사지 말라고 한다. 꼭 필요한 것도 아니면서 사는 것이 돈만 많이 쓰는 거라며 사지 않아도 되니 자기 생각해서 사지는 말란다.

뉴질랜드는 중학교까지 예절교육과 규칙 잘 지키기, 운동하기 등 책 없이 순수교육만 한단다. 그 교육을 받고 자라서일까 완전 뉴질랜드 사람이다. 우리나라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잘 살아야 교포들이 힘이 난다고 한다.

종종 여행을 가는데 이런 가이드는 처음이다. 우리들의 농담에 기겁을 하는 모습에 한바탕 웃지만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사람이다. 그렇더라도 모국어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가이드를 하려면 모국어 구사는 기본이어야 한다.

북섬에서 그 가이드와 헤어지고 남섬으로 왔다. 청정 공기 같은 그 남자. 한국인임에 틀림없는데 속은 뉴질랜드 사람이며 순수함을 잃지 않고 자연과 닮은 그 남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난다.

가는 곳마다 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어눌한 말투와 제대로 된 설명이 부족해서 불만을 토로했던 사람들도 그 남자를 생각하는 듯하다. 한국인의 자부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깨끗한 심성을 간직하며 우리들에게 순수가 무엇인지 보여준 그 남자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몸도 마음도 미세먼지를 뒤집어 쓴 것 같은 나지만 앞으로는 주위 환경을 탓하지 않고 순수함을 지니고 산소 같은 청량감을 주는 사람이고 싶다. 산소 같은 그 남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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