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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세평] 군군 신신 부부 자자

김정호 백제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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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9.10.09 15:20
  • 기자명 By. 충청신문
‘있고’, ‘없고’의 세상이다. 나에게는 무엇이 있는가? 나에게는 무엇이 없는가? 있는 것은 내 안에 있고, 없는 것은 나 밖에 있다. 사람의 평가는 무엇이 없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다. 사람을 볼 때 장점을 본다. 단점은 많다. 장점은 찾으면 누구나 몇 개쯤은 가지고 있다. 단점을 감추려 하지 말고 장점을 개발하라고 한다. 물질, 재능, 지식, 건강, 권력, 희망, 사랑, 기쁨, 만족, 감사, 불만, 교만, 미움, 의심, 욕심…. 누구나 좋은 것을 많이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힘이 모든 것을 정의한다. 상대적 박탈감이 쌓인다. 힘은 공감능력을 약화시킨다. 인간으로서 기본이 안 된 인간들이 만들어진다. 강자의 당당함은 약자의 비굴함을 강요한다. 고소, 고발 천국이다. 억울한 자, 피해 입은 자보다 배운 자, 우월한 자가 더 나선다.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 臣臣 父父 子子). 논어 안연 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제 구실, 제 노릇을 잘 해야 한다. 군불군 신불신 부불부 자불자(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한다면 감당하지 못한다.

삼국유사 신라 경덕왕 때 충담사가 지은 향가 ‘안민가(安民歌)’가 있다. “아으, 군다이 신다이 민다이 하날단, 나라악 태평하니잇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로다. 승려가 공자의 정명사상을 원용했다. 누가 이 구절을 패러디한다. “임금 죽고, 신하 죽고, 백성 죽으니, 나라가 태평하도다.”

장장 유유 상상 하하(長長 幼幼 上上 下下). 어른은 어른다워야 하고, 젊은이는 젊은이다워야 하고, 윗사람은 윗사람답게 처신해야 하고,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의 도리를 알아야 한다. 나이 먹어도 나잇값을 못하고 피우면, 민망하다. 장유유서(長幼有序)는 단순한 위계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른답지 못하면 그 질서는 유지될 수 없다.

작은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관리자는 관리자답게, 선임은 선임답게, 신입은 신입답게 한다면 일 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청청 여여 야야(靑靑 與與 野野). 청와대는 청와대다워야 하고, 여당은 여당다워야 하고, 야당은 야당다워야 한다.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가치가 전복되어 헷갈린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상대성이다. 여우와 두루미의 우화가 있다. 상대방이 못 먹는 음식만 내놓는다. 서로 초대한들 어울리지 못한다. 납작한 접시, 목이 긴 병. 짧은 혀를 가진 동물과 긴 부리를 가진 동물은 서로 식사하는 방식이 다르다. 골탕 먹이기, 트집 잡기를 해서는 사귈 수 없다. 공동체로 나아가지 못한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다양성이다. 소수든 다수든 서로 다름을 받아들여야 한다. 선(善)과 악(惡)의 대결 구도로 나눌 일이 아니다. “정말로, 진실로, 참으로, 확실히” 명예를 걸고, 양심을 걸고, 목숨을 걸고, 걸 것도 많다. 많은 것을 단호하게 거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위선이다.

아름다운 10월, 가을 풍경 보러 가야하는데 나서기가 껄끄럽다. 휴일마다 광장에서집회가 열린다. 방송은 지겹도록 들쑤신다. 집토끼, 산토끼 숫자를 세느라고 바쁘다.

선생은 선생다워야 하고, 목회자는 목회자다워야 한다. 어미는 어미다워야 하고, 새끼는 새끼다워야 한다. 자신의 본분을 지켜야 한다. 제 구실을 해야 한다. 국회의원도, 공직자도, 경영자도, 언론인도 특정 예외는 없다. 성찰해야 한다.

친구들과 만나 다독거리다가 느닷없이 분노조절이 안 돼 험한 고성이 오간다. “네가 조국이냐!” “그래, 내가 조국이다!” “빨갱이 같은 넘!” “토착왜구 같은 넘!”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가 무색하다. 우리는 어떤 현상에 대해 동일시하는 기술에 능하다. 반대로 어떤 현상에 대해 모른 체 하는 기술에도 능하다. 무엇을 동일시하고 무엇을 모른 체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은 미약하다.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를 구별하질 않는다.

지금 우리나라는 내부에서 진영논리로 적대감을 키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우리끼리 다투고 있는 사이 외세는 우리를 할퀴고, 호시탐탐 달려들고 있다. “과거를 잊지 말자”, “현실을 직시하자”, “미래로 나가자”는 말은 결국 같은 뜻이다. 엉킨 실타래도 풀 수 있다. 블랙홀도 출구는 있다.

“군군 신신 자자” “군다이 신다이 민다이” 유교적 명제는 오늘날 세태와 정확히 부합하지 않지만, 의미는 참고했으면 한다. 각각 본분을 지키자. 자기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자. ‘있고’ ‘없고’로 갈라질 때가 아니다. 세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열패감에 빠져 있을 겨를이 없다. 나에게는 목숨이 있고, 가족이 있고, 이웃이 있고, 나라가 있다. 합쳐서 막으면, 망하지 않는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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