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의사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며 학교를 자퇴하고 1926년 야학당을 개설해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농촌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광주학생운동을 통해 농촌 개혁운동보다 민족 독립이 먼저라는 것을 깨닫고 1930년 3월 상하이에서 김구를 만나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맹세했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홍커우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일본의 상하이 침략 승리 기념식이 열리자 시라카와 대장과 노무라 중장이 있는 단상 위로 폭탄을 던져 침략의 원흉을 처단했다.
이 의거는 세계 각지에 보도돼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렸으며, 중국 국민정부가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계기가 됐다.
윤 의사는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2월 일본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