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세상사는 이야기] 다정한 오월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입력 : 2020.05.19 10:54
  • 기자명 By. 충청신문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주말 오후 집에서 가까운 산행에 나섰다. 높이 393m의 비교적 완만한 등산 코스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아 이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겐 익숙한 산길이다. 적당히 가벼운 티셔츠에 발 편한 운동화를 신고 한 시간 반 정도 가볍게 걸을 수 있는 둘레길도 있어 주말이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산을 찾는다.

음성에서 충주로 가는 36번 국도를 가로지르는 육교를 건너면 작은 산길이 시작된다. 길 양쪽 옆으로 울창하게 뻗어 있는 온갖 나무들은 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서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작년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갈참나무 밑으로 지난해 떨어진 열매가 뿌리를 내려 새 생명을 키우고 있다.

반 시간 남짓 걷다 보면 둘레길로 접어든다. 보폭을 늦추고 천천히 주변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기에 좋은 길이다. 어렸을 적 엄마는 자주 나를 앞세우고 구불구불 산길을 걸어 절을 다니셨다. 항상 쌀이나 잡곡 한 말을 머리에 이고 한 손은 머리의 짐을, 다른 한 손은 내 손을 잡아주셨다. 나는 엄마가 이끄는 대로 길을 걸으며 눈에 보이는 꽃이며 나무 이름을 묻곤 했다. 철쭉과 진달래를 구분하는 법도 그때 알았다.

지난 어버이날에는 목소리로만 부모님을 뵈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만남이 정지된 이유다. 엄마는 수화기 너머로 ‘너희가 괜찮으면 나도 괜찮다.’ 하셨지만 전화를 끊고 뒤돌아서는 순간 코끝이 매웠다. 한평생 자식들 먹이고 입히느라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한 당신의 고단한 삶이 더없이 애잔했다. 새벽부터 호미를 쥐고 밭에 나가면 자식에게 해줄 것이 생기고, 밤늦도록 손에 물을 묻히면 자식 신세는 지지 않아도 된다며 늘 바쁘게 사신 부모님이셨다.

둘레길을 반 시간쯤 걷다가 능선을 타고 오르면 작은 산성에 이른다. 산성 아래로는 대략 2~3m의 성곽길이 이어지는데 그 길옆으로는 아름드리 낙엽송이 꼿꼿이 서서 지나는 객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낙엽송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는 지금껏 울퉁불퉁한 산길을 걸어오느라 수고했다며 전해주는 선물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산 정상에 오르면 시내 전경이 그림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유년 시절 아버지께서도 나를 데리고 수시로 마을 뒷산을 오르곤 하셨다. 허약하게 태어나 늘 집안의 근심이었던 딸자식 건강을 염려해 운동 삼아 걷기 시작한 산행은 오랜 시간이 흘러 우리 부녀 사이에 따뜻한 추억을 많이 쌓게 되었다. 산꼭대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이곳저곳 지명을 일러주고 그 유래에 대해서도 전설 같은 이야기로 내 귀를 쫑긋 세우게 하셨다.

아버진 몇 해 전 뇌경색을 앓으셨다. 젊었을 적엔 훤칠한 키에 넓은 이마와 비스듬한 가르마가 인상적인 멋쟁이셨단다. 거기에 한자에도 능통해 마을의 온갖 행사에 불려 다니기까지 했다며 자주 당신의 젊은 날을 회상하셨다. 글 모르는 동네 어르신들의 편지를 대신 읽어주고 써주는 일을 보람으로 아셨지만 뜻하지 않게 찾아온 병마에 한동안 우울증도 앓으셨다.

한 시간여의 산길을 돌아 내려오는 눈앞은 온통 푸른빛으로 고요하다. 그 어느 해 보다도 잔인한 사월을 견뎌냈으니 이젠 오롯이 눈부신 오월만을 기대하건만 아직도 세상 밖은 어수선하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끝이 있고 원점이 있으니 본래의 자리를 찾아 일상으로 돌아갈 날 또한 머지않았으리라. 성장하는 자연만큼이나 감사함이 떠오르는 계절, 오월도 어느새 중순을 넘어섰다. 부모에겐 자식이 명약이라는 말이 있다. 남은 오월, 나날이 늙어가는 부모님께 다정한 하루하루를 채워드리는 꽉 찬 날들이기를 바란다. 무릇 늙어가는 부모님에 대한 연민이 없는 자식은 부모를 쓸쓸하게 한다고 하지 않던가.

저작권자 © 충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충청신문기사 더보기

하단영역

매체정보

  • 대전광역시 중구 동서대로 1337(용두동, 서현빌딩 7층)
  • 대표전화 : 042) 252-0100
  • 팩스 : 042) 533-7473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황천규
  • 법인명 : 충청신문
  • 제호 : 충청신문
  • 등록번호 : 대전 가 00006
  • 등록일 : 2005-08-23
  • 발행·편집인 : 이경주
  • 사장 : 김충헌
  • 「열린보도원칙」충청신문은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 노경래 (042-255-2580 / nogol69@dailycc.net)
  • Copyright © 2024 충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ilycc@dailycc.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