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탓’- 표준국어대사전에는 ‘① 주로 부정적인 현상이 생겨난 까닭이나 원인, ② 구실이나 핑계로 삼아 원망하거나 나무라는 일’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래서 ‘일이 잘되면 내 탓이고, 안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도 있다.
살다 보면 참으로 많은 탓을 하게 된다. 사전의 풀이에서 보듯 ‘탓’은 상당이 부정의 의미를 갖고 있다. 어찌 보면 자기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핑계 대는 일과 비슷하다.
‘탓함’을 정신운동으로 승화시킨 일이 있었다. 1990년대 김수환 추기경과 천주교 평신도회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된 ‘내 탓이요’ 운동이다. 이 ‘내 탓이요’는 천주교 미사 기도문의 고백 기도문에 나오는 말이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했습니다’라고 신자가 고백하면서 자신의 가슴을 세 번 치는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하는 미사 예절이다. 이 운동은 90년대 중반쯤 슬그머니 사라졌다. 아마도 ‘내 탓’이 아닌 ‘네 탓’이 되어버린 모양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살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얼마나 ‘내 탓’으로 돌릴까? 가끔 뉴스를 보면 정치인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거나 책임질 일이 생기면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고 ‘전(前) 정권’이나 상대편 당(黨) 때문이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다. 전 정권에서 일어나고 원인을 제공했다 해도 현재에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책임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내 탓’이 아니고 ‘네 탓’이다.
십여 년 전 손자의 초등학교 도덕책에서 본 이야기가 떠오른다. 형제가 살았는데 형 집은 늘 웃음꽃이 넘치고 아우 집은 늘 찡그리며 살았다. 하루는 아우가 보니 형이 반바지를 입고 싱글 벙글한다, 아우는 그 까닭을 물었다. 형은 “새 바지를 샀는데 좀 길어서 줄여 달라고 했더니, 마누라가 줄여 놓은 것을 큰 딸이 줄이고, 또 작은 딸이 줄여서 반바지가 됐다”고 했다. 큰 딸은 어머니가 일하고 피곤한데 밤 늦게 바느질 하는 것이 안되어 줄이고, 작은 딸은 엄마, 언니 편하게 해주려고 해서 줄이고…. 비록 새 바지가 반으로 줄었어도 서로 “내가 해야지”하는 그 마음이 갸륵해서 행복한 웃음을 짓는 형이 아우는 부러웠다.
아우도 시장에 가서 바지를 샀고, 길으니 좀 줄여 달라고 아내와 딸들에게 부탁했다. 며칠 후 보니 바지는 그대로 였다 아내와 딸들에게 바지를 왜 줄이지 않았는가를 물었다. 모두가 하나 같이 “어머니가 하는 줄 알고”, “큰 딸이 하겠지”, “작은 딸이 하겠지”하고 모두가 내 탓이 아닌 네 탓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고 아우는 형님 집과 자기 집의 차이점을 깨달았다는 이야기이다. 형네는 가족 모두가 ‘~다운’, ‘~답게’ 살아왔고, 아우네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네 탓과 핑계를 대는 삶을 만들어 왔다.
善書不愧毛筆(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장인(匠人)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운동선수들도 운동기구를 탓하지 않는다. 음악가들도 악기를 탓하지 않는다. 설령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도 도구를 탓하기 전에 자신을 되돌아본다, 그런 수양된 자세가 고수를 만들어 가는 길이 아닐까?
어느새 6월이 됐다. 예년과 다르게 더위가 일직 찾아 왔다. 다가오는 장마를 생각하면 벌써 부터 짜증이 나려고 한다. 이런 때, 쌓이는 stress를 네 탓으로만 돌리지 말고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하면서 한 단계 수양 된 모습으로 이 여름을 넘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