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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어린이날을 바라보며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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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2.05.03 16:50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아주 오래전 일이다.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생활한 지 몇 해 되지 않던 어느 날 아침 사무실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소리였다. 우리 반에서 개구쟁이로 소문난 일곱 살 난 남자아이의 엄마였다. 아이의 엄마는 아주 조심스러운 말투로 내일이 어린이날인데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자장면을 한 그릇 사 먹이고 싶다며 물었다.

어느 이른 초봄 아이의 손을 잡고 유치원으로 입학원서를 쓰러 온 분은 아이의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께서는 아들 내외가 이태 전 이혼을 했고 아들은 저 멀리 다른 지방에서 일하느라 한 달에 두어 번 집에 오며, 며느리는 그 후 연락하지 않고 아이에게도 일절 엄마 얘기는 하지 않는다는 가정사를 세세하면서도 덤덤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당신께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모든 연락은 본인 앞으로 해 달라며 입학원서를 작성하고 가셨다.

그렇게 아이의 가정환경을 알게 되었는데 아이 엄마의 전화는 뜻밖이었다. 더불어 그런 부탁을 하는 예는 지금껏 이쪽 일에 종사하는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수화기 너머로 느껴지는 간절함이 너무도 절실해 보여 머리로는 행정적 절차를 생각하면서 가슴으로는 나도 감성을 앞세웠다. 전화를 끊고 잠시 이성을 되찾고 보니 보호자인 할아버지께 말씀드려야 할 일이 적잖이 걱정되었다. 평소 아이의 엄마에 관해 툭툭 던지는 지나는 말이 그리 달갑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다른 그 어떤 날보다 어린이날에 엄마는 아들이 보고 싶었고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자장면 한 그릇을 먹이고 싶다는데….

약속한 날. 아이의 엄마는 유치원으로 자장면 두 그릇을 배달시켜 아이와 단둘이 빈 교실에서 먹고 있었다. 창밖에는 봄꽃과 여름꽃이 섞여 무더기로 피어있고 나뭇잎은 한층 더 짙은 초록으로 싱싱한 오월이었다. 아이는 참새처럼 연신 재잘대며 맛있게 자장면을 먹고 있는데 엄마의 젓가락은 도통 올라갈 줄 모르는 것이 슬몃슬몃 창가로 보였다. 얼추 시간이 흐르고 아이와 엄마가 헤어지는데 아이는 엄마에게 다음에 또 자장면을 사달라는 말을 하고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오월의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청명한데 또 언제일지 모를 다음을 기약하는 두 모자 사이도,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마음도 착잡했다.

다음 날 아이의 할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 화를 내셨다. 원칙상 아이에 관한 모든 사항은 입학원서에 보호자로 명시되어 있는 당신과 협의해야 함에도 이를 어겼다는 것이다. 할아버지 말씀이 모두 옳았기에 두말없이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며 할아버지의 화를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 아주 오래전 일이다.

어느새 오월이 시작되었다. 푸른 신록의 가로수길 마냥 온갖 행사가 즐비하게 늘어선 가정의 달. 그 첫 시작의 포문을 여는 어린이날이 되면 가끔 그때 그 일이 생각난다. 그날 이후로 그 엄마는 또 아이를 만나 자장면을 먹었을까. 그 아이도 이젠 다 큰 성인이 되었고 어느 사회 속의 한 일원으로 살고 있을 텐데 지금은 서로 편하게 연락을 주고받고 있을까. 그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유치원에서 생활하다 보면 아이들과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참 많다. 엄마, 아빠의 사랑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한부모 가정,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도 많이 늘었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하는 어린이날, 어떤 유형의 가정 속에서 자라든 우리 아이들이 충분히 보호받고 존중받으며 늘 사랑 속에 자라서 언제나 활짝 웃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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