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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아버지의 집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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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2.06.07 14:57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아버지를 모시고 당일치기로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이라기보다는 그 옛날 아버지가 올망졸망 자식들 키우며 살던 고향을 돌아보고 왔다. 며느리도 사위들도 끼워 넣지 않고 오로지 시간이 되는 자식들만 동행했다. 남동생이 운전하고 나는 아버지 옆에 앉아 참새 노릇을 했다. 이것저것 준비한 간식거리를 내밀며 종알종알 옛이야기를 꺼내 추억을 소환해내는데 아버지의 눈빛은 줄곧 창 너머 바깥 풍경에 가 닿아 있었다.

두 시간 남짓 차를 몰아 도착한 고향 마을은 변해 있었다. 마을을 지키는 입구의 커다란 등나무는 여전히 초록의 잎을 달고 바람결에 춤을 추는데 구불구불 정겹던 논들은 어느새 바둑판 모양으로 질서가 정연했다. 아버지가 사셨고 내가 뛰놀던 우리의 옛집 역시 새 주인을 만나 적잖이 바뀌었다. 아담했던 흙 마당에는 푸른 잔디가 깔렸고 돌멩이를 쌓아 올린 담장 대신 높이 쳐진 연둣빛 휀스 사이로 붉은 장미가 한껏 뽐을 내고 있었다. 그나마 대문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장독대 옆에는 여전히 작약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휠체어에 앉은 채 멀리서 이제는 남의 집이 된 초록 대문을 오래도록 바라보셨다. 나도 덩달아 어린 시절 수없이 드나들었던 나의 옛집에 눈이 갔다. 이맘때 새벽이면 모내기를 끝낸 논의 물을 보느라 언제나 삽 한 자루를 어깨에 둘러메고 집을 나서던 아버지의 뒷모습, 바깥일을 살피고 돌아오면 사락사락 싸리비로 마당을 쓸었고 부엌에선 달그락달그락 엄마의 아침밥 짓는 소리,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집 앞 도랑물…. 고향 집에는 곳곳마다 지난 시절의 기억이 참 많다. 아버지에게 집이란 무엇이었을까.

몇 해 전 이맘때 아버지는 이 집에서 갑자기 쓰러지셨다.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다음날은 모를 심기로 되어있어서 당일엔 논을 삶느라 저녁 늦게까지 일을 했단다. 밤이 깊어서야 늦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녘에 일어나다가 그대로 쓰러졌다는 것이다. 이후로 아버지는 집을 떠나 병원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셨다. 한때 잠깐 병세가 좋아져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쓰러져 결국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머릿속 혈관들이 시한폭탄처럼 얽혀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는 형국이라는 의사의 소견은 참 무서웠다. 시골에서의 모든 삶을 정리하고 엄마도 시내로 보금자리를 옮겨드렸다. 근처에 오빠 내외가 살고 있으니 자주 들여다볼 수 있고 무엇보다 혼자 그 많은 농사를 감당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남은 생이 그렇게 병원에서 채워가던 중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수시로 면회 가던 일상이 정지되고 아버지는 생전 처음 병원이라는 섬 안에 갇혀버렸다. 급기야 지난겨울 확진까지 받아 몇 날을 고열과 인후통에 시달리며 생사의 고비를 넘긴 끝에 지난달에야 겨우 시작된 면회, 한껏 수척해진 얼굴만큼이나 마음에도 상처가 생겼는지 시시때때로 글썽글썽 눈물을 보이는 아버지를 대면하며 딱 한 번만 고향에 가보고 싶다는 말씀이 자식들 가슴에 돌덩이로 내려앉았다. 외출은 절대적으로 위험하다는 병원의 완강함을 무릅쓰고 결국 아버지의 손을 잡고 길을 나선 것이다.

하루만의 짧은 고향 나들이였지만 아버지는 금방 세수하고 난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밝아져 있었다. 자식들은 내일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생기더라도 오늘 하루 아버지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좀 더 욕심을 내자면 아버지의 오늘 이 하루가 남은 생을 굳건히 견뎌내는 힘이 되기를, 그래서 좀 더 가벼운 삶이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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