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문화속으로] 아 옛날이여

이혜숙 수필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입력 : 2022.12.05 13:11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이혜숙 수필가
모처럼 시간이 된다는 딸이 여행을 가잔다. 엄마를 쉬게 해 준다며 갈 곳을 정하라 한다. 아기 데리고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아직은 코로나가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는데 갈 곳이 마땅하지 않다. 그냥 아빠가 일하는 대천으로 가자고 했다. 곧 다가올 아빠의 생일이니 그냥 생일 국이나 끓여 먹자고.

언제였던가. 차를 몰고 전국을 떠돌며 혼자만의 여행에 푹 빠진 때가. 역병이 세상을 삼키고 때맞추어 아기가 오면서 언감생심 여행은 꿈도 못 꾸었다. 여행은 언제나 마음이 설렌다. 이렇게라도 운전대를 잡고 떠나는 시간이 황금처럼 느껴진다.

가는 내내 나무들이 살짝 얼굴을 붉히려 하고 노란 국화는 길손의 마음 깊숙이 들어와 가을이 왔다고 알려준다. 엊그제 심은 것 같은데 벼는 황금빛이 되어 살랑거리는 바람에 따라 하늘거린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다. 해변도로를 달리다 보니 한쪽엔 갯벌이 펼쳐있고 반대쪽엔 황금 물결이 살랑대며 춤사위를 보인다.

딸도 너무 예쁘다며 탄성을 지른다. 바닷물이 빠진 자리에 조개 캐기 체험하는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양동이를 하나씩 든 아이들은 온통 진흙을 묻히고도 웃는 얼굴이 해맑다. 코로나로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상황에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 주는 부모들 마음이 곱다. 꼰대 말로 하자면 나 때는 이렇게 해 줄 생각은 꿈에도 못 했는데 젊은 부모들이 자식을 위하는 마음은 정말 예쁘고 대단하다.

오래전에 강화도 보문사에서 5일 동안 기도하며 지낸 적이 있다. 기도를 마치고 바닷가를 거닐다 보면 밀물이 들어온다. 사르륵사르륵 소리가 정겨운 노랫소리 같아 밀물 때면 바닷가로 나갔었다. 썰물 때와 밀물 때가 소리가 약간 다르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서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소리. 그 소리를 대천에서 듣게 되면서 가끔은 바닷길을 걷곤 했다. 몇 년 전 남편과 먼 거리의 길을 걸어서 식사하고 온 적이 있는데 힘들다고 다음부터는 차로 오자고 했다. 이 길을 걷는 이유는 밀물이 들어올 때 나는 소리와 별빛이 좋아 걷는 거라며 힘들더라도 걷자고 고집을 세웠다.

무작정 차를 몰고 달리다 보면 목적지를 정하지 않아도 기분이 좋았다. 오래전, 가을이 깊어졌을 때 갑사에 간 적이 있다. 길 양쪽에 나란히 서 있는 가로수가 고운 단풍 옷을 입고 나에게 손짓하듯 인사를 한다. 누군가의 수고로 이렇게 아름다운 가로수가 심어졌을 텐데 그분들의 수고를 뒤로 한 채 아름다움만 보고 있었다. 그때는 회색빛 도시에 갇혀 살 때라 누군가의 수고가 이렇게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귀촌하고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꺾꽂이를 하고 나누어 심었다. 가뭄이 오면 물을 주어야 했고 잡초가 꽃모종을 덮으면 뽑아줘야 했다. 그런 수고를 한 후 가을이 되자 국화가 아름다운 자태와 향기를 보내주었다. 그제야 알았다. 작은 꽃도 누군가의 손길이 있어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거란 것을.

남편 숙소에 짐을 풀고 대천 해수욕장으로 갔다. 여름이 지나서 사람들이 별로 없겠지 생각했는데 모래사장에 온통 사람들로 가득하다. 대부분이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이다. 어딜 가나 아이들이 많은 걸 보니 요즘 아이들은 참 복이 많다는 생각이다.

손녀는 밀려오는 물에 겁을 내지 않고 발을 담근다. 처음으로 가까이 가 본 바다에 호기심이 이는지 마냥 서서 작은 파도를 맞는다. 젊은이들은 짚트랙을 타는가 하면 해상으로 연결된 레일바이크를 타며 가을을 맞고 있다. 내 마음대로 갈 수 있진 못하지만 이렇게라도 잠시 휴식의 순간이 행복하다. 이제 혼자만의 여행은 꿈일지 모른다. 한동안은 아기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겠지. 아이와 함께 하는 또 다른 여행을 계획해 볼까.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요즘은 비가 잦은 것 같다. 돌아오는 길에 수덕사라도 들려 오려 했건만 내리는 비에 곧바로 집으로 와야 하는 상황이 아쉽다. 단풍이 짙어지면 또 가까운 데라도 여행을 떠나보고 싶다.

내 주변에 86세인 언니가 계시다. 연세가 많음에도 운전을 한다. 다리가 불편해서 걷기는 힘들어도 운전하는 것은 괜찮다고 한다, 나도 그때까지 할 수 있을까. 젊을 때와 비교하면 내 인지능력도 조금 다른 것 같다. 겁 없이 속도전이라도 벌이듯 쾌속 운전했는데 요즘은 방어운전과 저속운전이다. 가끔은 나도 모르게 속도를 올릴 때가 있다. 속도계가 높은 걸 발견하면 바로 가속페달에서 발을 뗀다. 언제 운전대를 놓을지 모른다.

마음이 급해진다. 운전대를 잡지 하면 어쩌나. 그럴 땐 방콕만 해야 하나. 더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면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게 될까. 하루 이틀 미루다 흘러가는 시간에 나도 떠밀려 운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시간 될 때마다 좋아하는 여행을 가야 할 텐데.

아! 옛날이여! 돌리고 싶은 시간. 여행가는 아니지만 색다른 즐거움으로 더는 후회하지 않는 삶으로 여행을 하며 내 인생의 여정을 엮어 보고 싶다.

저작권자 © 충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충청신문기사 더보기

하단영역

매체정보

  • 대전광역시 중구 동서대로 1337(용두동, 서현빌딩 7층)
  • 대표전화 : 042) 252-0100
  • 팩스 : 042) 533-7473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황천규
  • 법인명 : 충청신문
  • 제호 : 충청신문
  • 등록번호 : 대전 가 00006
  • 등록일 : 2005-08-23
  • 발행·편집인 : 이경주
  • 사장 : 김충헌
  • 「열린보도원칙」충청신문은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 노경래 (042-255-2580 / nogol69@dailycc.net)
  • Copyright © 2024 충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ilycc@dailycc.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