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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길 인생] 복싱과 50년 임영재 대한복싱협회 중앙심판 위원

암흑가 유혹 뿌리치고 '엘리트 충남 종합복싱 체육관' 지도사범으로 후학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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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2.12.22 14:49
  • 기자명 By. 정완영 기자
▲ 복싱 후배들을 위해 스파링 파트너를 해주고 있는 임영재 대한복싱협회 중앙심판위원.
▲ 복싱 후배들을 위해 스파링 파트너를 해주고 있는 임영재 대한복싱협회 중앙심판위원.

외길인생은 외롭고 수많은 시행착오가 발목을 잡는다.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름대로 성공을 했다고 해서 정상에 서는 것도 아니다.  남들이 인정을 해준다고해도 어딘지 모르게 부족함을 느낄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시작해 모두가 ‘엄지척’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그 힘든 길을 걸어왔기에 외길 인생에 존경심과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편집자 주]

[충청신문=대전] 정완영 기자 = 12살에 복싱을 시작해 50년 동안 외길 인생을 걸으며 ‘엘리트 충남 종합복싱 체육관 지도사범, 대한복싱협회 중앙심판 위원인 임영재(62) 심판.

임 심판위원은 1960년 1월 대전 가양동에서 5남 1녀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많이 방황하면서 동네에서 싸움질도 일삼았다. 싸움하면 늘 상대를 때려 눕혔고 말썽이 끊이질 않았다.

그 때 어린 영재를 유심히 눈여겨보던 이가 있었다. 당시 영재가 태어난 동네인 가양동에 있던 충남 종합복싱 체육관 김종태 사범(2002년 작고)이다.

영재는 가양초등학교 5학년이던 12살 때 김종태 사범의 권유로 복싱을 시작했다. 이 날부터 김 사범은 임 심판위원이 은퇴한 지금까지 떼려야 뗄 수 없는 영원한 스승으로 남아있다.

대전 동중학교에 입학하고는 더욱 복싱에 전념했다. 복싱만이 어려운 현실을 잊어버릴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였지만 중학교 때는 소년체육대회(소년체전)와는 인연이 없어 입상 하지 못했다.

중학교 1학년 때인 14살에 어머니가, 17살에는 목수일을 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영재는 고아가 됐다. 두 분 모두 고혈압이었다. 형제들은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서면서 막내였던 영재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고, 대전체고와 당시 복싱 명문이었던 청운실고(현재 예덕실고)에 진학 제의도 있었지만 진학을 포기했다.

복싱만은 놓을 수 없어서 운동을 계속하면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1978년 충남방적 실업팀 입단으로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이 해에 충남 대표로 선발돼 출전한 59회 인천 전국체육대회에서 고대하던 첫 메달을 목에 걸었다. 동메달이었다.

다음 해인 1979년 60회 충남 전국체전이 대전에서 열렸다. 임 심판위원은 결승전 경기를 가장 잊지 못한다.

고향인 대전에서 열린 경기였기 때문이다. 이후 10년동안 밴텀급 충남대표로 꾸준히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당시에는 대통령배 대회와 전국체전 외에는 출전비와 숙식비 등 모든 비용을 개인이 부담해 출전해야 했다. 돈이 넉넉지 않았던, 그래서 1년에 많은 경기에 나서지도 못했다. 밴텀급(-54㎏)에서 페더급(-57㎏)으로 체급을 올려가며 복싱은 계속했다.

운명의 여인을 만났다. 1981년 제62회 전국체전이 서울에서 열렸다. 잠실 실내 체육관으로 복싱 응원을 온 서울 모 여고 1학년 여학생과 사랑에 빠졌다. 형편이 어려울 때여서 서울로 만나러 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지금은 아내가 돼 평생 반려자로 살고 있다.

신혼 초, 낮에는 중학생들을 지도하면서 국세청 주류단속반에서 일을 했고 아내도 미용실에 취업하면서 부부가 함께 합심하여 남보다 더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할수 있다.

평생 은인으로 생각하는 김중식 씨(현 언론인)를 만나 당시 성행하던 나이트클럽에서 일을 했고, 복싱으로 다져진 주먹을 쓰기도 했었다.

김씨는 직업 부여에만 그치지 않았다. 너무도 어려웠던 가정형편을 전해 듣고는 잊지 못할 어느날 집을 장만하라면서 당시 31평 아파트 한 채 값에 해당하는 3800만원이란 거금을 건네주었다.

이를 계기로 집을 마련하게 되었고 집 마련은 가정경제 기틀을 다지는 데 큰 힘으로 작용하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이 40(2000년) 불혹의 나이에 아내의 권유와 내조에 힘입어 중도에 포기했던 향학열에 불을 지피면서 2012년에는 방송통신대학 경제학과도 마쳤다.

복싱만하고 공부를 하지 못해서 무식하다는 소리가 듣기 싫었고, 심판을 준비하면서 학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2002년에는 영재를 복싱으로 이끌었던 김종태 사범이 돌아가셨고, 김 사범이 운영하던 충남 종합복싱 체육관 운영이 어려워져 이름을 승계하기로 했다. 심판 자격증도 땄다. 체육관은 둘째아들인 임홍국 관장이 운영하고 있다.

충북 옥천 동이면에 대회 출전 전에 집중훈련을 할 수 있는 훈련장을 2021년에 마련했다. 부지 150평에 건평 25평 남짓 20명이 동시에 훈련할 수 있는 장소다. 숙소는 편백나무로 뒤쪽에는 로드 웍을 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지난해 까지는 스파링 파트너도 했다.

▲ 대전시 성남동 신협 3층에 있는 '엘리트 충남 종합복싱 체육관'.
▲ 대전시 성남동 신협 3층에 있는 '엘리트 충남 종합복싱 체육관'.

새해가 되면 오정오거리 한남대 육교 밑에 엘리트 충남 종합복싱 체육관 2호점이 문을 연다. 모든 것이 은인들 덕분으로 복싱에 대한 열정을 불사를 수 있었다.

임 심판위원은 “젊은 시절 한 때 주먹을 썼어도 깨끗하게 썼다. 스승님이 운영하시던 ‘충남 종합복싱 체육관’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잘 계승해 가겠다”며 “남은 삶 대전 복싱의 발전을 위해 힘 닿는데까지 노력하고, 받은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50년 외길인생을 걸어온 ‘복싱인’다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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