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머물 것 같던 겨울 그림자는 어느새 몇 걸음 물러서고 있다. 지난 수 년간 우리네 얼굴마다 장막처럼 드리워졌던 마스크도 하나 둘 벗겨지고 가벼워진 심호흡과 함께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게 오랜 날 참고 기다렸던 희망의 봄날이 약속대로 찾아왔다. 멀어져 희미해졌던 기억속의 사람들이 불쑥 찾아와 꽃처럼 안겨 웃어줄 것 같기도 하다. 의지와 다르게 자꾸만 뒤쳐졌던 의욕도 움트는 자연의 기운에 힘입어 벌떡 일설 수 있을 것 같은 새봄의 문이 열렸다.
새봄은 그렇게 큰 소문 없이 조용히 찾아왔건만, 인간사 한편은 아직도 겨울 한복판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마음 편히 살아가기엔 미덥지 못한 불길한 징조들이 곳곳에 널려있다. 다양한 위험요소와 함께 인간관계의 갈등 수위는 더 높아지고 있다. 일찍이 거두어냈어야 할 상흔의 딱지 같은 그늘이 미래로 나가야 할 길에 드러누워 그 길을 막고 있다. 많은 민생들이 그 길 앞에 일단 멈추어 어디로 가야할지 방황하고 있는 오늘이다.
이념갈등, 노사갈등, 빈부격차, 치열한 정쟁은 그 경계를 쉽게 허물 수 없을 만큼 철통같이 단단하다. 상호 다름을 인정하거나 이해와 보완의 상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죽거나 살거나 양보 없는 편싸움이나 다름없는 그 심각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장기적인 경기불황 등 단숨에 극복할 수 없는 주변여건에 의한 개인 서비스요금이 폭탄으로 안겨지고 있다. 그처럼 폭발 직전의 위험성은 고스란히 서민생활의 무게로 얹어지고 있다. 그 같은 사회적 혼란을 기다리기나 한 듯 타의 약점이나 부족함에 대해서는 잔인할 만큼 인간 이하의 타격을 가하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내편이 아니면 악마의 탈을 씌워서라도 가차 없이 돌을 던지는 풍조가 죄의식 없이 자행되고 있기도 하다.
정치도 다를 바 없다. 책임과 권한이 주어지는 자리에 앉게 되면 저들만의 리그로 변질되고 있다. 국민을 주인의 섬기겠다던 약속은 찾아보기 어렵다. 정파 간 상호견제와 선의의 경쟁으로 국가발전에 이바지하라는 국민들의 간절한 외침은 개봉하지 않은 우편물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네 편 내편 갈라치기로 선량한 국민들의 작은 소망마저 꺾어버리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정치의 현주소라고 해도 심한 표현은 아닐 것 같다.
모두가 그렇지 않겠지만, 가진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채우기 위한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되겠는가, 권력을 거머쥔 사람들이 깨끗하고 공정한 책임과 의무에 충실해야 하는 공복의 명찰을 숨긴 채 자신만의 영달과 안위만을 위하면 되겠는가,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과 비판을 외면하면 되겠는가 말이다. 아직은 살만한 대한민국이라고 하지만, 부끄러움과 분노가 한데 얽혀 미래로 가는 길을 막는 오늘을 변명할 수 없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옛말이 있다. 갈 수 있는 길이라 해도 반칙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 것이 최소한 양심마저 지키려는 사람다움일 것이다. 긴 겨울을 이겨낸 봄이 찾아왔다. 서로 다투지 않고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연의 순리에 따라 움트는 경이로운 생명의 질서에 가야할 길이 보인다. 다시 새봄에 길을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