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세월호 참사 9주년, 잊지 않으려는 작은 움직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입력 : 2023.08.04 08:55
  • 기자명 By. 김해인 기자

지난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9분경, 97년생인 본 기자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시절. 당시 영어 듣기 시험을 보던 도중 같은 나이 친구들이 떠난 수학여행길에서 배가 전복되었다는 속보를 접했다. 그러다 얼마가 지났을까. 전원 구조가 됐다는 기사가 들려왔지만 그것은 오보였다. 

승객은 총 459명, 대부분의 단원 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인천을 출발해 제주도 도착 예정이었던 세월호는 전라도 진도섬에서 서남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서 전복되었고 이 참사로 시신 미수습자 9명을 포함한 304명이 사망하였다. 

최초 신고자도 단원고 학생이었는데 사건 발생 직후 가장 먼저 구출된 것은 세월호 선장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선장은 사건 발생 당시 "움직이지 마세요, 움직이면 더더욱 위험합니다"라고 방송한 것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일었다. 학생들 중 안내방송을 듣지 않고 갑판이나 창가 쪽에 있던 아이들은 구조가 됐는데 안내방송을 듣고 배 안에서 나오지 않은 아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배 안에서 가만히 있으면서 구조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세월호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세월호는 불법 개조를 통해 억지로 12년 더 쓸 수 있게 한 배였다. 

클립아트코리아
클립아트코리아

세월호가 사실상 완전히 침몰된 시간은 16일 오전 11시 20분 정도였는데, 세월호 실종자 수색을 위해 잠수요원이 본격적으로 투입된 것은 사고가 난 지 8시간이 지난 4월 16일 오후 5시 정도였다. 특히 사고 발생 첫날인 4월 16일은 실종자들의 생존 가능성이 높았지만, 처음 수백 명의 구조요원이 투입되었다고 알려진 바와 달리 수중수색은 3차에 걸쳐 16명이 투입되는 데 그쳤다.

또 세월호는 사고 초기 선체가 왼쪽으로 기울어졌지만 3분의 2 이상이 해상에 떠있는 상태를 상당 시간 유지하고 있어 이 시기 구조장비의 빠른 투입이 필요했다. 그러나 선체 부양을 위한 리프트백 투입은 4월 18일에야 이뤄졌고, 야간구조작업을 위한 오징어잡이 어선은 침몰 나흘째, 잠수부들의 이동을 돕는 대형바지선은 침몰 5일째인 4월 20일에야 뒤늦게 투입됐다.

그렇게 단원고 아이들을 포함한 희생자 유족들의 끝없는 기다림이 시작된 것이다. 

한편 오는 4일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차남 유혁기 씨가 국내로 송환된다. 유혁시 씨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최후 국외도피자다. 3일 법무부는 "유 회장의 차남 유혁기씨의 신병을 범죄인인도 절차에 따라 미국 당국으로부터 인계받아 오는 4일 오전 5시20분 인천국제공항으로 송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저작권자 © 충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충청신문기사 더보기

하단영역

매체정보

  • 대전광역시 중구 동서대로 1337(용두동, 서현빌딩 7층)
  • 대표전화 : 042) 252-0100
  • 팩스 : 042) 533-7473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황천규
  • 법인명 : 충청신문
  • 제호 : 충청신문
  • 등록번호 : 대전 가 00006
  • 등록일 : 2005-08-23
  • 발행·편집인 : 이경주
  • 사장 : 김충헌
  • 「열린보도원칙」충청신문은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 노경래 (042-255-2580 / nogol69@dailycc.net)
  • Copyright © 2024 충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ilycc@dailycc.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