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세상사는 이야기] 원칙

서필 목원대 교수·테너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입력 : 2023.10.17 15:17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서필 목원대 교수·테너
한국문화예술연합회에 등록된 전국의 문화예술회관의 수는 225개다. 회원기관이 아닌 공연장을 합하면 수백 개에 이른다. 이 순간에도 전국의 공연장에선 크고 작은 공연들이 숨 쉴 틈 없이 맞물려 돌아가기에 정교한 일정관리와 조율은 필수다.

오페라 한편이 올려지기까지 공연장은 돈과 시간, 공간과 싸움을 한다. 먼저 배경이 되는 세트가 세워진다. 4막짜리 오페라가 장면별로 변환이 이루어진다면 셋업에만 족히 사흘은 걸린다. 1막이 끝나면 무대 한켠의 포켓에 1막 세트를 밀어넣고 반대편 포켓에 있는 2막 세트를 다시 밀고 나오는 식으로, 흡사 테트리스 하듯 막별 세트를 이리저리 비켜 가며 공연을 진행한다. 이런 세트 전환을 수없이 연습하며 안전사고방지와 시간 단축을 목표로 긴밀하게 진행한다.

다음은 조명리허설이다. 디자인된 조명을 실제 질감과 분위기에 맞게 설치하고 구동하며 진행하면 족히 이틀은 걸리지만, 대관료와 시간 때문에 세트 전환과 병행하는 때도 많다. 이젠 연주자들 차례다. 오케스트라가 자리 잡고, 출연진들이 무대 위에서 의상을 입고 실제 세트를 밟아가며 리허설을 진행한다. 조명이 없는 뒤편부터 안전수칙을 준수하며 동선과 조명구역으로의 이동, 그리고 음향상태를 쉴새 없이 체크한다. 캐스팅이 여러 팀이면 팀당 온전히 하루씩은 사용해야 안전하고 정확한 공연이 가능하기에 오케스트라와 팀별 리허설을 진행한다. 그래서 두 캐스팅이 번갈아 두 번씩 공연하는 일반적인 4일 공연이라면, 준비하는 데엔 적어도 2주 전 셋업이 필요하다. 제작사는 하루하루가 돈인 현장 상황과 공연장의 다른 대관 공연을 위해서도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준비 대관 열흘과 공연 나흘이 필요하지만, 최대한 효율적으로 운영해서 준비대관을 일주일 안팎으로 단축하기 마련이고, 이게 가능하기 위해선 온갖 현장 전문가들이 새벽부터 밤까지 뛰어다녀야 한다.

10여 년 전, 어느 지방의 공연장에서 오페라를 하던 일화를 소개할까 한다. 두 달간의 연습을 끝내고 무대 리허설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캐스팅 한팀은 무대 리허설이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한 팀이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하면 나머지 한팀은 객석에서 자신의 더블캐스팅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안전은 둘째고 공연의 수준 저하가 예상되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공연장이 지자체에 소속이다 보니 공연장을 컨퍼런스나 지자체 행사로 사용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대관일정이 빡빡해서 준비대관이 사흘밖에 허락되지 않은 탓이었다. 무대 세트가 세워지는 하루하고도 반나절 동안은 안전 문제로 출연진은 출입이 통제되고, 공연 전날 조명리허설을 겸하면서 첫날 공연팀만 전쟁처럼 리허설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공연장은 대규모 좌석과 주차장을 갖춘 곳이다. 지자체 주관 행사를 하기에 최적이다. 관계자들에겐 강력한 유혹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공연장은 공연을 위해 지어진 곳이다. 공연장에서 연주하기 위해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통과해서 대관을 허락받아 연주하는 장소다. 공연일정 소화도 벅찬데 공연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연주회장이라니. 간혹 예정에 없이 연주회 전에 참석한 내빈들을 소개하고 축사를 하는 순서가 진행되기도 한다. 공연제작자로선 감사를 표하고 싶은 마음이 이해되지만, 높은 확률로 이분들. 중간에 나가신다.

대전 예술의전당이 개관하던 날, 공연장 앞 야외 기념식장에 비가 왔다. 그러나 참석한 사람들은 실내로 이동하지 않고 야외행사를 강행했다. 우산 밑에서 당시 염홍철 대전시장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강조했다. “저 안에 1500석 좌석의 공간이 있는데도 우리가 이곳 야외에서 비를 맞는 이유는, 저곳이 행사가 아닌 오직 공연만 해야 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대전예술의 전당이 이번 달 개관 20주년을 맞았다. 전국 공연장 중에서 자체제작 오페라를 거뜬히 제작할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히는 공연장이다. 수도권과 전용 오페라하우스가 있는 대구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매년 오페라를 올리는 극장으론 독보적이다. 그만큼 제작 운영 시스템이 무르익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개관 이후 지켜온 무너지지 않는 원칙이 있었기에 수준 높은 공연을 올리는 공연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고 지금도 출연진이 아닌 사람은 공연장에선 마이크를 잡을 수 없는 곳이다. 그리고 얼마 전 개관 20주년 기념행사도 어김없이 야외에서 열렸다. 야외에 깔린 의자는 1500석. 아트홀 객석과 같은 숫자다. 여러모로 상징하는 바가 크다.

저작권자 © 충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충청신문기사 더보기

하단영역

매체정보

  • 대전광역시 중구 동서대로 1337(용두동, 서현빌딩 7층)
  • 대표전화 : 042) 252-0100
  • 팩스 : 042) 533-7473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황천규
  • 법인명 : 충청신문
  • 제호 : 충청신문
  • 등록번호 : 대전 가 00006
  • 등록일 : 2005-08-23
  • 발행·편집인 : 이경주
  • 사장 : 김충헌
  • 「열린보도원칙」충청신문은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 노경래 (042-255-2580 / nogol69@dailycc.net)
  • Copyright © 2024 충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ilycc@dailycc.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