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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으로] 말과 행동의 속도

한기연 시인·평생교육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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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9.12.23 14:33
  • 기자명 By. 충청신문
한기연 시인·평생교육강사
한기연 시인·평생교육강사
다른 때보다 힘들었던 수업을 마치고 피곤해서 일찍 집으로 갔다. 현관 앞에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물건을 시키는 일이 많아서 으레 주문했던 것이려니 생각하고 밀쳐두고 누웠다가 열어 보았다. 빨갛고 작은 애기 사과가 들어 있었다. 내가 주문한 것이 아니었다. 보낸 이의 주소가 경북으로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라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끊고 ‘사과’를 보낸 진짜 주인에게 다시 전화를 해 고마움을 전했다.

얼마 전 활동하고 있는 단체에서 출판기념회 겸 낭송회가 있었다. 어느 새 서른 번째 책이 나왔다. 행사가 시작되기 전 책을 받고 목차를 훑어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무리 찾아봐도 내 이름이 없었다. 오랫동안 함께 한 편집인에게 투정부리듯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 뒤에 과거 집행부로 있을 때 나의 실수를 언급했다. 덧붙인 말에 마음이 언짢았다. 자리로 돌아와서도 그 생각뿐이었다. 원고마감을 넘겨서 한편을 내더라도 책에 글이 실리지 않는 것은 내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더구나 ‘30집’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달린 책이 아니던가? 표정을 감춘 속내는 시끄러웠다. 나도 집행부로써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도 됐다. 그리고 이번 편집을 본 언니는 수집된 원고를 이어 받았기에 엄밀히 보면 당사자의 실수도 아니다.

행사가 끝난 후 ‘미안하다’고 말한 언니에게 ‘이번일에 지난일의 실수를 얘기한 부분이 속상했다’고 말했다. 내 감정을 정확히 표현했고, 그 부분에 대해 사과를 했기에 앙금 없이 풀었다. 그런데 그 언니가 진심어린 말과 함께 앙증맞은 애기사과를 보내 온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미안하다’는 말도 그 자리에서 선뜻해주고 빠른 행동으로 보여 준 모습이 고마웠다. 지금까지 나는 표현하는 게 서툴러서 마음속에만 두고 하지 않은 말이 많았다. ‘싫다’는 감정을 표현하기까지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상자에 담긴 빨간 사과에 온기가 전해지면서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히브리어로 ‘하카랏 하토브 ha-karat ha-tov'는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행한 선행 행동을 알아보는 것을 말한다. 택시를 타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왔을 때 고마워하거나 사소한 것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꼈을 때 그 마음을 전하며 인사하는 것을 말한다.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은 그런 일이 생긴 바로 그 시간에 빠르게 해야 하는데 나는 그러질 못했다. 수업재료를 많이 주문하다보니 택배를 받을 일이 많다. 작년까지만 해도 택배상자를 무인함이나 경비실에서 무겁게 들고 찾아 왔다. 그런데 올해는 무거운 택배상자가 몇 개씩 현관앞에 놓여 있다. 기사분이 친절하게 집 앞까지 배달해 주고 있다. 고마운 마음만 가지고 있었다. 며칠 전 급한 물건 때문에 전화했을 때는 물류창고에 보관해 주셔서 찾으러 갔었다. 물건을 찾지 못해 여러 번 통화했을 때도 영상통화까지 시도하며 찾을 수 있었다. 그 일 이후 기사아저씨께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에 그녀의 사과상자를 받게 됐다.

그녀를 보면서 고마움과 미안함을 말로 표현하는 것도 빨라야하지만 마음을 전하고 싶은 행동에도 속도가 필요함을 알게 됐다. 낯선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면, 그 마음을 바로 전해야 하는 것처럼 잘못을 바로 인정하는 용기와 행동도 즉시 해야 한다. 차일 피일 미루다보면 말이든 행동이든 기회를 놓치기 쉽다. 언어적표현과 비언어적표현을 잘 활용한다면 우리의 삶도 좋은 방향으로 바꿔 갈 수 있다.

빨갛게 잘 익은 사과 한 입을 베어 문다. 달콤한 과즙이 입 안에 가득하다. 지금 당장 사과즙 한 박스 사러 가야겠다. 내일 문 밖에 내 놓고 택배아저씨께 마음을 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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