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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양면의 여름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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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0.08.11 13:48
  • 기자명 By. 충청신문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늘상 들고 나는 계절처럼 올해도 무난하게 그리 지나갈 줄 알았다. 청포도가 익어가기에 적당히 더운 여름날이었고, 들녘에는 봄날에 뿌려놓은 씨앗들이 농부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하나, 둘 여물어가고 있었다. 학교들도 어느덧 방학에 돌입했고 직장인의 꿈이라는 여름휴가도 다가오고 있었다. 단지 세월을 산 경험으로 날씨를 짐작하는 동네 어르신들께서는 예년보다 비가 덜 내린다며 가볍게 가뭄을 걱정하기도 하셨다.

비가 내렸다. 지난해보다 다소 늦긴 했어도 더없이 반가웠다. 토닥토닥 빗소리가 메마른 대지 위로 숨을 불어 넣어 주었다. 오랜만의 단비는 세상의 모든 초록빛 자연에게도 반가웠으리라. 단 몇 시간 만에 텃밭의 상추가 흐트러진 잎을 모아 싱싱하게 살아났고 아낌없이 잘라내도 하룻밤만 지내고 나면 주먹만큼 부추가 자란다며 엄마는 한껏 들뜬 어조로 전화를 하셨다. 힘든 줄도 모르고 온종일 밖에서 비설거지를 했단다.

반가움으로 시작되었던 빗물이 이젠 많은 사람의 상처가 되고 있다. 어느 지역에선 산사태로 평생 한 번도 떠나지 않았던 집을 잃었고 수년 동안 옹기종기 모여 터를 잡고 가꿔온 마을 전체가 물속에 잠긴 곳도 있다. 어디가 논이고 어디가 도로인지 온통 물바다를 이뤘다. 폭우와 하천범람으로 물에 떠다니다가 살기 위해 지붕 위로 피신한 어느 축사의 소들이 당시의 긴박했던 현장을 고스란히 말해준다. 참혹한 폭우의 현장을 뉴스 속 영상으로 대면하면서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의 허망하고 안타까운 죽음에 코끝이 시큰거린다.

유년시절 고향에는 집 앞으로 큰 강이 흐르고 있었다. 굽이굽이 흐르는 강줄기는 우리 마을 사람들은 물론 반경 한 시간 거리에 접한 이웃 지역 주민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다. 물이 맑고 경사가 완만해 여름이 오면 텐트에 낚시도구를 챙겨 물놀이 하는 휴양객들로 붐볐다. 그러나 장마철에 접어들어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부모님은 물론 동네 사람들 모두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강물이 넘쳐 마을을 덮칠뻔한 일이 몇 해 걸러 뜨문뜨문 있었기 때문이란다.

어느 해 여름인가 비가 아주 많이 내렸다. 끝도 없이 내리는 빗물은 점점 강의 수위를 높였고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던 어느 밤, 사랑채 작은 방에선 할머니께서 비가 계속 오면 지대가 좀 더 높은 곳으로 피해야 한다며 머리맡에 옷가지를 싼 무명보따리를 포개 놓은 채로 나를 안고 설핏 잠이 든 모양이었다. 갑자기 뒤란의 울타리가 무너지면서 흙더미가 할머니와 나를 덮쳤다. 아버지가 소리를 지르며 뛰어오시고 엄마가 맨발로 나를 들쳐 안고 마당으로 내달리던 기억은 장마철만 되면 새록새록 불에 덴 자국처럼 선명하게 돌아온다.

비에 대한 기억은 동전의 양면처럼 무너진 흙벽 속에 갇히는 공포를 주었지만 소소한 즐거움도 주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두 살 아래 남동생과 나를 데리고 물길을 막아놓은 농수로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를 잡는 일이었다. 메기와 자잘한 붕어, 미꾸라지가 잘 잡혔는데 그날 저녁에는 어김없이 마당에 솥단지가 걸렸다. 엄마는 마당 한 귀퉁이 텃밭에서 자라는 온갖 채소를 듬성듬성 썰고 밀가루를 반죽해 수제비를 넣은 칼칼한 매운탕을 끓여냈다. 그리고 온 가족은 마루에 둘러앉아 고봉밥을 먹고 힘을 내 폭우와 맞서 싸웠다. 집 주변으로 밀려 내려온 토사를 긁어내고 쓰러진 논의 벼를 세우며 그렇게 또 한 해 장마를 이겨내고 남은 여름을 알차게 즐겼다.

올여름 상처받은 이들이 씩씩하게 일어서길 바란다. 따뜻한 밥 한 그릇으로 든든하게 속을 채우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 속에 저마다의 손을 내어 작은 힘이 되어준다면 본래의 자리로 안착하는 시간은 그리 멀지 않으리라.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로 온기를 전할 때다. 힘든 시간을 견뎌낸 만큼 우리 삶의 한 걸음은 또 나아가 있을 것이다. 모든 시간에는 동전처럼 양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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