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비누오페라
[세상사는 이야기] 비누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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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7.2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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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필 목원대 교수·테너

서필 목원대 교수·테너.
서필 목원대 교수·테너.

비누오페라(Soap Opera). 굳이 번역하자면 막장드라마 정도 되겠다.

왜 하필 비누냐면 미국에서도 아침시간대 막장드라마가 주부들에게 인기가 많다 보니 중간광고에 비누나 세제 광고협찬이 많아 자연스레 비누오페라로 불리게 되었단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막장드라마는 매우 유용한 아이템이다. 신분상승을 겪어내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물론이고, 불륜과 출생의 비밀이 빠지면 섭섭할 정도다. 사건의 발단은 항상 귀갓길 동행을 누군가 우연히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등장인물간 대화를 엿들어 이를 통해 모략을 꾸미는 모습은 기본 클리셰로 자리 잡았다. 너무 식상한 전개에 짜증도 나지만, 보다보면 다음회가 궁금해 견딜 수 없다는 아침드라마를 보노라면 우리의 의식적 수준이 이것밖에 되지 않나 한편 부끄럽기도 하다. 과연 우리만의 일일까?

최초의 오페라가 생긴 르네상스 시대 내내 오페라는 꽤 완고한 소재의 룰이 있었다. 일단 그리스 신화에 바탕을 두던가 혹은 역사물이어야 했다. 최초의 귀족중심의 오페라가 일반대중에게 개방된 상업오페라로 방향전환을 하고 나서도 소재의 룰은 여전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대중들은 늘 자극적인 소재에 이끌리기 마련이었는지, 인격성을 빼다 박은 그리스신들 사이의 질투 음모 살인이 빈번한 내용들이 주된 소재였고, 역사적 소재 또한 박진감 넘치는 불륜스토리가 단골소재였다. 네로황제의 정실부인이었던 옥타비아를 권모술수를 통해 밀어낸 불륜녀 포페아의 이야기가 정사(正史)인데, 선악구도를 바꿔서 포페아가 사랑의 힘으로 나쁜 부인을 밀어내고 황제를 쟁취한다는 각색의 오페라가 가장 인기였으니 말이다.

신화와 역사물의 제약에서 벗어나자마자 오페라가 찾은 소재는 풍자와 비판이었다. 역사상 가장 흥행하고 지금까지도 탑 레퍼토리에 속하는 롯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와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작가 보마르셰의 드라마 3부작 중에 1, 2부를 다루는데 여기엔 이미 현대적인 요소를 아득히 뛰어넘는 막장드라마가 찬란하게 펼쳐진다,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잃은 친구 딸을 기꺼이 자기 수양딸로 삼아 키워주던 명망 높은 박사 아저씨는, 그녀가 성인이 되어 죽은 양친의 유산 소유권을 행사하려고 하자 엄청난 계책을 세우는데, 그건 바로 어제까지 딸처럼 키우던 아가씨를 자기 마누라로 삼아 합법적으로 재산을 빼앗으려는 것이었다. 그런 아가씨 앞에 백마 탄 왕자, 아니 백작님이 나타나 동네 이발사 피가로와 협력해 멋지게 구출해 결혼한다. 그러나 1편에서 정의의 사도였던 백작은, 2편에서는 심복 피가로의 약혼녀를 탐하는 악인으로 돌변하는 본격 스펙터클 심리드라마로 전환한다. 그런 남편에게 버림받은 1편의 여주인공 백작부인은 철없는 사춘기 소년의 구애를 이기지 못해 그만 3편의 주인공을 낳게 된다. 반전에 반전이 거듭된다.

요즘의 막장드라마들은 시청자들의 반응을 살피며 분량을 추가하거나 들어내고, 심지어는 원작을 바꿔서 개연성의 실종이나 어색한 스토리라인으로 욕을 먹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말 분노가 치밀고 손발이 오그라들며 부끄러워진다.

그리스 로마신화의 오르페우스는 여러 작곡가가 앞 다투어 작곡해서 무려 70여 편의 오페라가 나올 만큼 인기소재였다. 원작에서 오르페우스의 아내 에우리디케가 독사에 물려죽자, 남편은 그녀를 찾아 지옥으로 내려가 지옥의 왕 플루토를 감동시켜 그녀를 구출한다. 그러나 지상으로 나가기 전까지는 절대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계약이 있었음에도 아내의 집요한 질문에 열받은 남편이 뒤를 돌아보게 되어 아내는 영원히 죽게 된다. 지상으로 돌아와 방황하던 남편은 동성애에 빠지게 되고 디오니소스의 노여움을 사 갈기갈기 찢겨 죽는다. 원작의 불편한 엔딩을 당시 관객이 기꺼이 여길 리가 없었고, 이를 간파한 당대의 극작가들은 그 시절 유행이던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신들의 개입이라는 방식으로 원작을 수정한다, 부인을 다시 잃게 된 장면에서 남편이 단도를 뽑아 자살하려하자 갑자기 사랑의 신인 아모르가 나타나 금도끼 은도끼 마냥 ‘지금까지 너희의 사랑을 시험해 본 것이니라’ 어쩌구 하며 아내를 살려주고, 부부는 사랑의 찬가를 부르며 장엄한 해피엔딩을 맞는다.

사람 사는 모양새가 다 똑같다. 오페라라고 딱히 어렵지 않다는 뜻이다. 드라마를 좋아한다면, 이미 오페라를 즐길 준비가 되어있고, 오페라 한두 편을 보다보면 막장드라마를 능가하는 중독성까지 경험할 수 있다. 막장스토리를 잊게 해 줄 멋진 음악까지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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