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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도청 10년, 내포문화 돌아보기] 6. 수덕사 능인선원 가는길 만공선사 체취 느낄수 있어

선(禪)의 향기 ①수덕사-만공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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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2.09.28 11:53
  • 기자명 By. 안순택 기자
▲ 수덕사 입구
▲ 수덕사 입구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가을이 오는 수덕사는 붉다. 매표소 앞에서부터 빨간 꽃무릇이 피어 손님을 맞는다.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문을 거쳐 오르는 길은 꽃무릇 천지다. 대웅전 앞에 선다.

수덕사를 찾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 대웅전을 보러 온다. 건축시기가 명확한 것으로 가장 오래된 건축물, 국사시간에 배운, 맞배지붕, 주심포 형식, 배흘림기둥 등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구조와 외형은 아주 단순하다. 그러나 이 절집은 장식을 하지 않고도 얼마나 세련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 수덕사 대웅전
▲ 수덕사 대웅전

기둥은 가운데가 슬쩍 부풀고 윗부분을 좁게 마무리한 배흘림으로 지붕을 가볍게 떠받들고 있다. 사람 인(人)자 형태로 맞닿아 있는 맞배지붕은 단아하면서도 경건하다.

기둥 간격이 넓어 건물이 답답하지 않고 개방적인 느낌을 준다. 특히 대웅전 옆면은 안정과 상승의 조화를 절묘하게 보여주는 황금비례다.

안벽은 지금 아무 그림도 없다. 하지만 원래는 아름다운 야생화와 비천상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1934년 대웅전 해체공사가 진행됐다. 이를 위해 단청과 벽화를 임천(林泉) 선생이 모사하던 중 1528년에 새로 칠을 했다는 기록을 찾아냈고, 벽화 속에서 원래의 그림을 찾아냈다고 한다.

이것이 건립 당시의 벽화로 판명돼 분리작업을 하던 중 1308년에 건립됐다는 기록도 찾게 됐다고 한다.

해체된 벽체는 분리된 상태로 남아 있다가 해방 혼란기에 흙더미로 폐기되었다고 한다. 대웅전 흰 벽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여기 화려한 벽화가 있었다.

대웅전만 보고 발길을 돌리는 사람은 수덕사의 지극히 작은 부분만 보고 가는 것이다. 수덕사를 제대로 보려면 정혜사(능인선원)로 가는 길을 올라야 하고 그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

▲ 수덕사 2대 방장 벽초스님이 놓은 1080계단.
▲ 수덕사 2대 방장 벽초스님이 놓은 1080계단.

대웅전 왼쪽 길을 따라 오르면 사면석불이 맞아준다.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사면석불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여기서 벽초스님의 1080계단이 시작된다. 계단은 정혜사까지 이어지는데 계단을 오는 이들에게 백팔번뇌를 열 번 내려놓으라는 당부를 담고 있다.

계단을 오르면 절벽 위로 작은 초당이 보이는데 이 초당이 만공선사가 터를 잡고 기거했던 소림초당이다. 조금 더 오르면 관세음보살상과 향운각을 만난다. 만공선사가 1924년 조성했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만공선사의 체취가 가득하다. 만공선사가 누구인가.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화하려는 일제 정책에 맞서 조선총독을 면전에서 호되게 꾸짖은 분이다.

1937년 3월 11일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열린 전국 불교 31본산(本山) 주지 회의. 조선총독 미나미(南次郞)는 주지 스님들을 향해 강압적인 어조로 입을 뗐다. “앞으로 조선 불교는 일본 불교와 합병해 더 큰 진흥을 이뤄야 할 것이다.”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책상을 두 손으로 내려치는 사람이 있었다. 마곡사 주지로 회의에 참석한 만공선사였다.

선사는 미나미 총독을 한 손으로 가리키면서 큰 소리로 일갈했다. “청정(淸淨)이 본연(本然)하거늘, 어찌하여 산하대지(山河大地)가 나왔는가.”

▲ 관세음보살 상
▲ 관세음보살 상

사자후는 멈추지 않았다. “데라우치 전 총독은 조선 승려들을 파계시킨 죄인이다. 그는 죽어서 무간지옥에 떨어져 고통받을 것이다. 이런 자들을 지옥에서 구하고 조선 불교를 진흥시키는 일은 조선 승려들이 수행을 통해 견성하는 길밖에 없다. 총독부는 조선 불교를 간섭 말고 우리 조선 승려에게 맡기는 것만이 유일한 진흥책이다. 이것이 바로 정교분립인 것이다.”

당시 일제가 받은 충격의 상태를 보여주는 문건이 최근 발견됐다. 1937년 발행된 ‘불교사’ 와 1940년 발간된 ‘조선총독부 시정 30년사’는 이렇게 적었다.

“조선 불교 진흥을 위해 노력했지만 기대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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